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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제사상보다 오래 남는 것 – 표동섭

07/10/2026
in 문화
[수필] 제사상보다 오래 남는 것 – 표동섭

내일은 어머니의 기일이다.

예전 같으면 오늘부터 마음이 분주했을 것이다. 무엇을 준비할지, 어떤 음식을 올릴지 하나씩 살피며 제사상을 차렸을 것이다.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은 호주에 살고 있고, 다른 한 아들은 한국에 터를 잡고 있다. 나 역시 오랫동안 두 나라를 오가며 살아왔다. 낯선 이국 땅에 머물 때에도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어머니의 제사를 정성껏 모셔왔다.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에게 제사는 단순한 의례만은 아니었다. 멀어져 가는 뿌리를 다시 확인하고, 그리운 부모님을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재작년 어머니의 기일, 영정 앞에 앉아 나는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이제 제사는 그만 모시겠습니다.”

말을 꺼내고 나니 오래된 숙제 하나를 내려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쉽게 내려놓은 것은 아닐까.’ ‘타향에 살면서 이제 조상마저 잊으려는 것은 아닐까.’그런 생각이 한동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타지에 나가거든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 우리 성씨는 드물어서 사람들이 네 이름은 잊어도 ‘표씨’라는 성은 오래 기억할 게다. 어디서든 부끄러운 일은 만들지 말아라.”

어린 나에게는 그저 엄한 아버지의 말씀처럼 들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낯선 이국 땅에서도 살아보니 그 말이 새삼 가슴 깊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내게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보다, 어디에서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 하나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던 것이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느냐. 내 삶 때문에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 수 있느냐. 돌아보면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삶의 이정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사를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씩 달라졌다.

우리 부모 세대는 참 많이 참고 사셨다. 자식 하나 잘 키우겠다고 당신들의 편안함은 늘 뒤로 미루셨다. 멀리 떠나 사는 자식을 걱정하면서도 좋은 옷 한 벌, 맛있는 음식 하나는 자신에게 아끼고 자식에게는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그런 부모가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살아온 방식대로 너희도 살아라”가 아니라,“너희는 너희가 살아가는 곳에서 너희 방식대로 잘 살아라.”그것이 아니었을까.

특히 우리처럼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부모가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은 거창한 제사상보다, 낯선 땅에서도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으며 따뜻한 밥 한 끼 나누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물론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것 역시 부모를 기억하는 소중한 방식이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형편이 다르고, 부모를 기억하는 방법도 다르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제사를 그만 모시는 것이 부모를 향한 마음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단지 부모님을 기억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진 것뿐이다.

지킨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형식을 내려놓음으로써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더 오래 지킬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어머니의 기일이 돌아와도 예전처럼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덜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타국에서 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나고, 좋은 풍경을 바라보다가도 생각난다. 손주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면 또 어머니가 떠오른다. 살다 보니 부모님은 제사상 위의 사진 속에만 계신 분들이 아니었다.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타향살이에 지친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려는 마음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그 안에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셨다.

내일 아침이면 어머니의 기일이다. 이번에는 조용히 어머니 사진 앞에 앉아 마음으로 절을 올리려 한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두 분이 남겨주신 마음을 잊지 않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가족과 이웃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겠습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의 가짓수가 사랑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절을 몇 번 했느냐가 효도의 깊이를 모두 말해주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사랑은 형식보다 오래 남고, 기억은 의식보다 깊다. 제사상은 더 이상 차리지 않는다. 대신 내 마음속에는 작지만 따뜻한 상 하나를 오래도록 차려두려 한다. 그 위에는 음식 대신 감사와 사랑을 올리고, 아버지가 남겨주신 삶의 기준과 어머니가 남겨주신 따뜻함을 올려놓으려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머니의 기일은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슬픈 날만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마음이 내 삶 속에서 이어지는 한,어쩌면 매일이 어머니를 만나는 날일 테니까.

-표동섭 Melbourne, Vict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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