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길
인생을 사노라면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난다. 알 수 없는 길일 때도 있지만 분명 잘 알려져 있는 길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인간들이 거쳐 가는 길.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부모로 살아가는 길. 이 길 위를 우리 대부분이 가고 있다.
지난 주말 저녁, 우리 부부가 호젓하게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평소에 전화를 잘 하지 않고 문자로 연락하는 딸아이의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려 받아보니 엄마, 하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다그칠 사이도 없이 교통사고가 크게 나 차는 폐차가 되고 제 남편은 병원에 있는데 쇄골에 금이 가 꼼짝도 못한다고 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오늘 새벽 이 가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사람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더니…
이 순간을 어떻게 잘 추스려나가야 하는데… 마음이 다급해지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새벽안개가 걷힐 즈음 우리 부부는 캔버라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그 동안 이 길을 오가며 무던히도 기쁨과 슬픔을 체험했다. 딸 아이가 연방정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기다림과 기쁨과 슬픔, 환희의 순간까지 인간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이 길을 가고 또 가고 있다. 차가 폐차가 될 정도라니 부디 사위에게 큰 일이 없기를 바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쇄골에 금이 가면 통증이 심할 텐데, 간절히 기도하며 다음 달에 독서토론 할 알베르 까뮈의 책을 펼쳤지만 이내 책을 덮고 말았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워져 가고, 이 끝나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 반문하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잘 살아간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 심오한 질문에 선뜻 답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테지. 혼자서의 넋두리에도 시간은 말없이 흘러가고 안타까운 내 마음에 버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늦장을 부리는 듯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지속되던 혼란스러움이 바닥을 드러낼 때 버스는 간신히 캔버라 터미널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사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 이름을 불러댄다. 손에는 샌드위치 두 개를 들고 배 고플 텐데 어서 먹으라고 건넨다. 그러나 내 입맛은 소태처럼 써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 나와는 반대로 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그나마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어 마중 나와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캔버라 병원까지는 십분 거리에 있어 금방 도착하게 되었다. 제발 몸이 괜찮아야 될 텐데 기도하는 심정으로 사위와 마주한 순간, 그의 흰 피부가 백지장보다 더욱 하얗고 눈 주위와 오른쪽 목 부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사위의 손을 꼬옥 잡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거기 그렇게 한 동안 서 있었다. 더구나 옆에 놓여있는 휴대폰이 활처럼 휘어져 있음을 보니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 짐작이 되었다. 그는 괴로운 듯 눈을 감은 채 찡그리고 있었지만 이만하기 참 다행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더 세밀한 정밀 검사를 한 후에 퇴원이 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오니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놀라고 힘들었을 사위를 위해 무슨 음식을 만들어 주어야 할지 난감하였지만 내가 아플 때 먹었던 부드러운 흰죽을 만들었다. 입맛이 없는지 몇 숟갈을 뜨더니 이내 수저를 놓는다.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흰 빵 한 조각과 푸딩이 전부였지만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그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를 꼬박 굶고도 창백한 얼굴을 나에게 돌리며 바쁜데 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딸이 제 남편에게 그가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가를 적으라고 메모지를 건네니 사위는 떨리는 손길이었지만 놀랍게도 샌드위치 재료들을 적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지, 본래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릴 때 먹었던 음식을 찾는다는 걸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딸조차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김치를 흰밥에 얹어 먹으며 왜 이리 김치가 당기는지 알 수가 없다고 얘기한다. 더구나 오징어 젓갈을 먹으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 아기가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를 가슴 절절이 얘기하니 성숙한 엄마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딸이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내었으니 이 사고를 통하여 딸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남편에 대한 죄책감도 함께 갖게 되었으니 그녀 마음에 복잡하고 불안한 마음이 깨끗이 치유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삶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우리는 모두가 다시 이 끝나지 않은 길 위를 가고 있다. 누가 주문한 것도 아닌데 자연적으로 서서 가는 길, 부모로써 가야 할 길, 인류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온 이 길,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나는 오늘도 걸어간다.
김인호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