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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문이 있는 자리- 4

09/03/2023
in 칼럼

출 변명기

내가 고향을 기억하는 한
고향은 곧 출간될 책이다
강 속에 이야기 강으로 흐르는
고요한 수면 아래
동리 사람 살던 지례 마을
다슬기를 줍고 반딧불을 쫓던 강가의
뒷말이 바닥에 고여 흐르는
강 머리말에는 자갈돌 밟는 소리가
강 후기에는 치열했다 쓰려고 한다
이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이유도 표4에 넣을 것이다

내가 저를 기억하는 한
저는 두 번째로 출간될 책이다
보이지 않아도 그 손바닥에는
지글거리는 태양의 질투를 쥐고
사막을 걷는 은둔의 미소가 흐르고 있다
초승달 같은 첫 장에는 제목을 굵게 잡고
나와 달라도 몹시 다름이여라고 쓰고
마지막 장까지 같은 말만 하려고 한다

고향이나 저는 나의 본체를 밝히는 근거
주제는 오직 한 가지
우리는 왜 근거 있는 행동만 하려고 몸부림을 치는가

윤희경 / 2015년 ‘미네르바’ 신인상 등단. 시집 <대티를 솔티라고 불렀다>. 전자시집 <빨간 일기예보>, 2022년 재외동포문학상 수상, 월간에세이 연재. ‘문학과 시드니’ 편집위원, 문학 동인 ‘빈터’, ‘캥거루문학회’ 활동 중

시작노트
지례는 임하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 이름이다. 낙동강 반변천을 따라 그야말로 꼭꼭 숨어 피는 꽃무더기 흐드러지던 산골동네였다. 종가 마루 끝에 앉아 듣는 새소리 풀벌레소리로도 한나절이 절로 흐르던 곳이었다. 낮에는 다슬기를 주워 국을 끓이고 사위가 조용해지는 여름밤이면 사촌 동서들과 강가에 나와, 더운 몸을 씻으며 웃음을 흘려보내던 곳이었다. 자갈돌 밟는 소리가 별빛만큼이나 선명하던 강가의 마을이, 임하호 속에 그대로 잠겨버렸다. 어연 수십 년이 지났으니, 옛정취인들 한 가닥 남아 있을 리 없다. 건너편 앞산만이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시사 때마다 재종 삼종 할 것 없이 다 모여, 파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던 젊은 시절의 내가 있던 곳, 이립 전부터 집안 어른들 틈에서 궁리를 배우던 곳, 슬하를 떠나는 것이 불안했던 출국 전 내 모습, 어느 구석에선가 그런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날의 내 모습과 겹치는 어떤 지점이 있어주기를 바랐다. 이역만리 이곳에서도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르면 인터넷으로 자주 들여다보던 곳. 집터만 봐도 친지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 저희들의 뿌리가 궁금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보고 싶던 사람들이 없으니 괜한 허기증만 일었다. 나는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갔던가, 나는 무엇을 떠나 무엇으로 갔던가. 이 낯선 정서적 서걱거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나이나 다름이 없고 피할 수 없는 격랑의 현주소가 되어버렸다. 수심(愁心)이 깊어진 강은 언제까지나 거기서 기다려 줄듯 하더니 그만 모른 척했다. 지례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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