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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광장- 사랑에 빠지다

31/03/2022
in 칼럼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가을 자락에 가랑비가 뿌리는 오후,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지독한 무기력을 겪으며 유일한 낙이던 책읽기마저도 마다하고 있다. 치료에 차도가 없어 탄식하고 있을 즈음 남편을 기다리는 병원 라운지에서 자원 봉사자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오후의 한가한 홀은 마치 고급 호텔의 로비 같다. 가끔 마주치는 그의 공연은 러시아 대가들의 음악을 악보 없이 연주한다. 나른한 오후의 음률은 마음속에 빗물처럼 흘러들어 잠시, 아픈 남편의 존재를 잊게 한다. 그리고는 내 영혼을 상트페테브르크 광장에 내려 놓는다.
모든 예술의 장르를 넉넉히 품은 러시아에서 느린 걸음의 여정을 시작한다. 대문호들과의 만남에 경건히 매무새도 가다듬는다.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안톤 체홉의 생가를 방문하기 전부터 도시 전체에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 그 대가들은 판단과 극복의 대상이 아닌 범접할 수 없는 저 편의 영역으로 오로지 작품만으로 소통하고 있다. 인간의 모진 역사와 비극을 방관하는 우주에 수없이 되묻고 갈등했을 것이다. 그들의 분노와 고뇌가 감히 느껴진다. 그 시대와 인간을 향한 처절한 통찰을 펜 끝에 녹아내려 글로써 우리를 구원하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안톤 체홉을 만난다. 암울했던 시대의 영향 말고도 생존만이 절실한 상황에서 고통을 희극적으로 고찰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의사였으나 결핵으로 짧은 생을 접기까지 고단함으로 소진된 그의 삶이 절절히 다가왔다. 파산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글쓰기는 심신의 노동행위이며 체력전이었다. 소모성 질환인 폐결핵을 앓던 그가 장편 대신 단편을 주로 쓰게 된 계기라고 추측한다.
그가 집필한 ‘귀여운 여인’과 재회한다. 주인공 올렌카는 사랑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자이다. 흥행사였던 첫 남편을 만나자 연극은 일상의 중심이 되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가치와 예술의 정점은 오롯이 연극이 중심이었다. 재혼한 목재상과 살면서는 각종 목재를 통해 세상을 관망하며 소통했다. 목재는 업무의 의미 있는 출발이었고 결론이었다. 두 번의 사별 후 이혼남 수의사를 만난 후에는 가축들의 페스트나 결핵 같은 질병, 도살장의 문제까지도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얼마 후 그와도 결별했다. 모든 것이 끝난 듯 사랑할 대상을 잃은 그녀는 자신의 존재마저도 거부하게 된다. 어느 날, 전 남편의 어린 아들을 떠맡으며 그녀의 마지막 사랑인 절절한 모성애가 시작된다. 다시 찾은 사랑에 그녀는 되살아났고 불안하고 서툰 관계에서도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얻는다.
젊은 시절의 나는 올렌카에게 공감할 수 없었고 체홉이란 작가에게도 실망했다. 주인공은 다정다감하며 건강의 상징인 장미빛 뺨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남의 이야기를 미소로 들어주는 최고의 미덕을 지녔다. 모든 남자들의 이상이며 구원형이 아닐까? 톨스토이가 올렌카를 성녀의 사랑이라며 극찬했는데 나는 남자의 속성과 이기심이라고 일축했다. 게다가 나의 속물적 근성에 비추어 그녀가 매우 아까웠다. 한결 같이 한심한 상대만을 골라 동정과 희생을 사랑이라 여기는 우매함에 부아마저 치밀었다. 당연히 페미니스트들의 혹평이 따랐고 지고지순이란 단어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여자들의 조건 없는 사랑을 노예근성으로 치부하며 무조건적인 애착관계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수많은 여자들이 더욱 똑똑해져 갔고 사랑에 손익을 계산했다. 그때의 나는 가끔 와인에 취해 소설 속의 사랑이 허구만은 아니라며 하찮은 소리를 해댔다. 문득 19세기 러시아 인물화의 여인과 올렌카가 오버랩된다.
이제 현실의 사랑은 더 이상 환상과 무모함이 아니다. 아픈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그 정서는 합리적이며 지혜롭기까지 하다. 건강하고 당당한 연애가 아름답지 않은가. 내 딸이 눈먼 사랑에 빠져 상처받고 헤맨다면 고통 따위는 강물에나 던지길 바란다. 즐기고 누릴 게 널려있는 이 세상에서 감성놀음 따위는 일회성 오락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꾸 외롭다. 죽을 만큼 사랑한 적이 있던가. 덧없는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데 사랑에는 연습이 없다. 소설 속의 사랑을 함부로 매도하던 가벼움은 멈추고, 온전한 가치를 잃은 그 단어를 조용히 음미하며 마음의 결을 보듬겠다. 올렌카의 생존 방식인 사랑은 살아야 할 이유의 전부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내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서로를 짐작할 뿐 완전한 판단은 신께 맡기자. 그녀를 재해석하는 나는 새로운 사랑을 이해하며 꿈꾼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 깊은 슬픔과 비극처럼 여기던 내면의 죄악과 치부도 구원 받겠다. 그녀와 나의 닮은 사랑을 저 바람이 기억하려나.
힘든 검사를 마친 남편이 창백하지만 예의 사람 좋은 얼굴로 내 앞에 들어선다. 우리가 사랑할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영혼이라도 바치고 싶다.

곽숙경 /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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