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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광장- 단출하게 살아가기

22/07/2021
in 칼럼

집을 줄여 이사를 앞두고 있다. 살아생전 마지막 집이 되기를 바라며 관리가 수월하고 역까지 걸어갈 수 있는 위치의 단층집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집을 찾은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대어를 낚은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산더미처럼 쌓인 묵은 짐들을 버리고 또 버려야 하는 갈등을 겪고 있다.

인구조사 자료에 의하면 호주사람들은 일생 동안 평균 일곱 번 집을 옮긴다고 한다. 꼽아보니 부모와 사는 동안 두어 번,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한 경우도 있겠고, 결혼으로 작게 시작한 보금자리, 자녀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업사이징, 빈 둥지가 되면 다운사이징, 요양원 혹은 요즘 듣게 되는 어시스트 리빙(assisted living) 등 얼추 계산이 된다. 이렇게 집을 옮길 때마다 가구며 장식품, 옷과 책, 부엌살림 등이 풍선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했을 터인데 사람들은 어떻게 용단을 내리고 살림살이를 처분했을까. 다운사이징 단계에 와있는 내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다. 적십자사나 구세군 기부처에 보낼 박스와 버리는 물건 박스에 넣었다가 다시 슬쩍 꺼내어 이삿짐 쪽으로 옮기며 나 자신 한심한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부부가 일하며 번 돈으로 하나하나 장만한 살림살이가 아닌가. 하지만 내려놓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홀가분하게 자유로워질 수가 있기는 할까.

집 매매를 담당했던 부동산 에이전트 소개로 집 정리를 직업으로 하는 소위 정리전문가 린이라는 여성이 우리 집엘 왔다. TV나 잡지에서만 어쩌다가 본 적이 있는데 정리는 물론 이삿짐을 싸고 새 집에서 정돈해 주기까지 맡아 해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최근에 갑자기 높아진 혈압 때문에 힘 드는 일하다가 병원신세라도 지게 될까봐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 집에서 26년 사는 동안 사들인 부엌용품 중에 곽에서 채 꺼내지도 않은 아이디어 제품이 나오거나 찾다가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던 물건도 나왔다. 이제껏 남에게 공개한 적이 없던 살림살이를 온통 드러내 보여야 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녀를 향하여 오히려 나 자신을 책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연 경험 많은 프로답게 나의 기분을 적당히 살펴줄 줄도 알았다. 감자깍기가 서랍에서 다섯 개가 나와 내가 난색을 보이자 자기도 어머니와 함께 살며 각자 선호하는 감자깍기가 달라서 두개를 갖고 있다면서 우리는 딸도 함께 사니까 세 개는 두라고 했다. 채칼도 여럿이고 칼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이제는 결혼해서 아이를 넷이나 낳고 사는 내 아들이 아기 때 사용하던 멜라민 밥그릇과 칸이 나누어진 접시도 어느 구석에서 나왔다. 이렇게 오래된 플라스틱 그릇은 기부 박스에 선뜻 넣지 못하고 주저하는 나를 지켜보던 딸이 ‘이제는 놓아주라’는 말대로 버리는 물건 박스에 들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 린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그런 의미가 있는 물건은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덕분에 나는 보이지 않는 탯줄이 아들과 아직 연결이 되어 있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보면 오래된 소꿉장난 같은 공기와 접시지만 나에겐 거기에 밥을 담아 먹이던 첫아들의 귀여운 모습과 몇 해 후 태어나 그릇을 물려받게 된 어린 딸의 밥 먹는 모습도 필름처럼 눈에 어른거리니 쉽게 버릴 그릇이 아닌 것이다. 아아, 이렇게 끌어안고만 있다가 어찌할 것인가.

사반세기 이상 살며 정든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한 것은 우리 부부에게 겁이 덜컥 나게 하는 사건이 있고나서였다. 앞뜰에선 남편이 사다리에서 톱질하다가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고 뒷뜰에선 내가 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져 벽돌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일이 있었다. 탁! 소리와 함께 머리를 부딪치는 순간 나는 단말마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뿐이랴. 일일이 나열하자면 머리가 아프다. 그렇다고 은퇴를 한 마당에 돈을 들여 사람을 부른다는 것은 남편에겐 언감생심이고 나 역시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처럼 힘을 못 쓰고 운동 삼아 천천히 할 수 있는 일도 제한되어 있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결단을 해야만 했다. 살림살이도 단출하게 줄이고 집도 손이 거의 안가는 아담한 단층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옮기자니 문제는 현재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대폭 줄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피아노를 비롯하여 자리를 차지하는 가구와 잡동사니들을 처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책부터 처분한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친정아버지 책장에 있던 오십 여년 된 세계문학전집을 호주까지 가지고 와서 이젠 버리라는 동생들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다. 살아 계셨으면 올해 99세가 되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리움으로 가슴이 메어지는데 내 어찌 재활용 통에 던져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래 살 것만 같다는 생각에 환갑도 칠순에도 잔치를 벌이지 않고 조용히 넘겼다. 어쩌면 나이 듦을 광고하는 것 같아 부끄러움을 피했다고나 할까. 옛적에 사람이 70년을 살기는 드물다고 희수(稀壽)라 했다지만 21세기 지금은 백세시대가 아닌가. 그런 내가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은 결코 나이대로 찾아오지 않음을 최근에도 경험하고 나니 그 마지막이 언제 나에게 닥쳐올지 모르지만 이번 이사를 가면 아끼던 그릇들을 아낌없이 사용하리라. 그릇장에 모셔만 두었다가 결국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일 년에 한번 설날에만 빛을 보는 그릇들은 행여 깨질세라 갓난아기 다루듯 꼭 내가 설거지를 해왔다. 언젠가 딸에게 시집갈 때 가져가라고 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갖겠단다. 오십 대 중년여성인 린에게 나는 젊었을 때 왜 이런 그릇들을 사 모으는 데 돈을 썼을까 반성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또 내 마음을 이해하듯 한마디 해준다. ‘괜찮아요. 그럴 때 행복했잖아요. 그러면 된 거에요.’

세상에서 거처를 옮기는데도 이렇듯 어렵고 진이 빠지는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갈 때는 그 마무리에 얼마나 할 일이 많을까. 아들네는 해외에 사니까 그렇다 치고 딸에게 너무 많은 짐이 되지 않도록 그때그때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보는 것이다.

권영규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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