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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문이 있는 자리- 26

18/08/2023
in 칼럼

성에, 성애

사라진다는 말이 멀어진다는 말보다
더 슬픈 이유를 찾다가
창문 안쪽으로 자라나는 얼굴을 본다

안과 밖이 다를수록 화려해지는 표정은
얼지 않으면 필 수 없어
해가 들기 전까지만 끌어안기로 한다

차가움은 꼬리가 쉽게 잘려 나가는 말
입맞춤 한 번에 내일이 한 개씩 사라지는 감각

흰 장막 긁어 안을 들추면
햇살이 지나간 입술은
끊임없이 녹아내리는 말의 흉터에 골몰한다

입안으로 서서히 스미는 통증과
시든다는 말이 갖는 단정한 매무새에 대해

당신이 입김으로 녹여버린 꽃말이
아직 다정하다면
입술에 난 상처는 그대로 두어도 좋겠다

볼록한 숨소리 애초에
유리창의 것이 아니었다면
흉터가 물방울 되어 흐르기 전
나는 다시
성스러운 이야기를 지어야겠다

바람이 봄을 밟기까지는
그냥 이대로 살얼음

  • 시작노트

‘성에’라는 단어를 지나는데 ‘성애’가 떠올랐다. 어떠한 이유나 개연성 없이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녹아버리는 것들, 잠시 왔다 사라지는 것들, 관계의 부질없음,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이었다. 언어의 유희가 시의 작은 덕목이라면 그쯤으로 이해되어도 좋겠다. 이 시를 내놓으며 의도하고 다르게 읽히는 확장성을 맛보았다. 성性이 성聖으로 바뀌는, 지극히 감각적인 단어가 묵직한 외연을 갖게 되는 경험, 시가 아니었다면 생각지 못할 언어의 후광이었다.

유금란 /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 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공저 ‘바다 건너 당신’.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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