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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광장- 마중물 준비하기

24/02/2022
in 칼럼

외할머니 댁 마당에 펌프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여름 방학 때 며칠 머물 설레임을 안고 언덕을 오르면 숨이 하늘에 닿는다. 덩달아 얼굴은 잘 익은 수박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른다. 맨발로 마중 나와 기다리는 할머니도 뒤로 한 채, 땀범벅이 된 몸으로 옷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나는 물 한 바가지부터 펌프에 붓는다. 펌프질 한 번으로 쉽게 끌어 올린 물이 냉장고 없던 시절에 온 몸의 땀을 식혀 준다. 엄마 심부름으로 힘겹게 들고 간 수박도 방금 퍼 올린 얼음같이 차가운 물속에 담가 놓는다. 이렇게 평범한 물 한 바가지가 제대로 쓰이기만 하면 사막을 통행하는 목마른 사람들은 생명까지 구하기도 한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미국에 죽음의 계곡 주변 ‘아마고사(Amargosa)’라는 사막이 있는데, 가로지르는 작은 길 중간쯤에 우물 펌프 하나가 있다고 한다. 그 펌프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깡통 속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다.
“펌프 옆의 흰 바위 밑에는 물이 가득 담긴 병이 모래에 묻혀 있습니다. 증발하지 않도록 마개를 막아 두었습니다. 그 물을 펌프에 모두 붓고 펌프질을 하십시오. 그리고 물을 다 쓴 후에는 다음 사람을 위해 그 병에 물을 가득 채워, 처음 있던 대로 모래 속에 묻어 주십시오. 추신: 병의 물을 먼저 마셔버리면 안 됩니다.” 라는.
소중한 한 병의 마중물은 땅 속 깊은 곳의 샘물을 끌어 올려놓고 자신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절실한 목마름을 해결한 사람들은 앞서 지나간 사람과 뒤에 이 곳을 지나갈 사람을 생명으로 연결한다.

몇 년쯤 뒤였을까. 어른이 되어 찾아간 할머니 댁의 펌프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약간 녹이 슬어 있었다. 이제 할머니가 많이 연로하시니 방 안에 앉은 채 반갑다 한다. 이 메마른 펌프로 땅 속 물을 땅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먼저 퍼붓는 한 바가지의 물로는 기별도 없다. 연달아 붓고 또 붓고 나서야 겨우 땅 속 깊은 곳의 물을 마중할 수 있었다. 내 녹슨 펌프에도 마중물이 간절한 때가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 무렵 시드니에서 우물 하나를 발견했다.
몇 년을 기웃거리다 도착했을 때는 스물세 명의 문학회 회원들이 이미 십삼 년 째 두레박질을 하고 있었으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길어 올린 맑은 물로 동인지가 다섯 권이나 발간된 뒤였다. 10주 동안 ‘수필 창작 교실’에서 제목 정하기부터 마무리 기법까지 충분히 알려주신 지도 선생님 덕분에 우리 5기 수강생 열두 명이 같은 우물에서 두레박질을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나의 글쓰기를 배움의 마중물로 끌어내어 문학회 회원이 되기에 이른 셈이다. 두레박에 욕심껏 물을 담으면 끌어올리기 힘들어 글이 매끄럽지 않고, 힘들이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면 또 물이 너무 적어 엉성한 글이 되고 만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십사 년 째 꾸준히 두레박질을 하고 있어 동인지 발행이 11집에 이르게 된다.

삼 년 째 코로나 펜데믹이 이어지고 있어 그 이전에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던 우리 문학회 회원들의 두레박질도 종종 뜸해지는 것이 우려되는 요즘이다. 작품 한 편 쓰려고 오랜 시간 책상 앞에 앉아 펌프질을 해보지만 마치 할머니 댁 녹이 슬어가던 펌프처럼 쉽게 물이 솟아오르지 않는다. 마중물이 부족한 것이다. 새로 맞이한 2022년에는 마중물을 충분히 준비 해 펌프에서 물을 콸콸 뿜어내게 하련다.

차수희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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