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레이드에 살고 있는 딸이 동영상을 보내 왔다. 화면에는 네 살 된 손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애잔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무슨 새 그림을 그리면서 서럽게 우는데 하도 이상하여 딸에게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처마 밑에 제비가 집을 짓고 새끼 세 마리를 기르면서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다 먹였고 새끼들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포섬이란 놈이 새들의 집을 기습하여 새끼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났단다. 그 바람에 튼튼하지 못한 제비 둥지가 포섬의 힘에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며 두 마리 새끼마저 죽고야 말았다. 딸이 새끼 두 마리를 땅에 묻어 주고 막대기로 십자가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손주들의 눈물 바람 속에 제비들 장례를 치른 셈이다. 여린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태어나서 처음 목격한 새들의 죽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런데 손녀의 여린 마음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었나보다. 그 이후로 아이는 말없이 유리창 너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렸다. 그런 와중에 그린 그림이 오늘 보내 준 동영상이었다. ‘새야 새야 울지 마라 새끼가 보고 싶어 우니. 산에 가면 새끼들이 있으니 산으로 가보아라. 내가 알려줄게’ 이렇듯 사위가 달래줘도 아이의 반응은 여전했다.
집과 새끼들을 모두 잃은 제비 한 쌍은 살던 둥지 주변을 맴돌며 울어대더란다. 이 사연을 읽는 내 가슴도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며칠 후 제비는 같은 장소에 흙과 검불을 물고 와 새로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처음 집을 지을 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는 듯 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늦어도 내년 5월 말에는 새끼들을 데리고 강북으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어서다. 한국을 포함한 북반구 제비는 겨울 추위를 피하여 먹이가 풍부한 강남으로 날아가고 남반구 제비는 같은 이유로 북으로 간다. 이렇듯 철새들의 행선지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여러 국가와 섬들이다. 새로 집을 짓고 알을 낳아서 품고 새끼를 길러서 구만리 하늘을 날아 갈 힘을 기르려면 훈련 할 시일이 촉박한 상황이다. 게다가 한 번 맛을 들인 포섬이란 놈이 또 오지 말라는 보장도 없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차라리 제비 집을 지어서 산란과 포란을 유도해 준다면 북으로 가는 길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서로 제비와 교감을 한단 말인가. 습관적으로 아니 본능적으로 새살림을 차리려는 불쌍한 제비 한 쌍.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불운을 뻔히 알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겠지만 시간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설마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닐까. 다행히 새로 새끼를 까서 날게 되었다 해도 그 먼 길을 다 날아가지 못하고 호주 내륙 어디쯤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앞만 향해 가고 있는 인간의 삶도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한치 앞의 미래도 모르면서 지금 살아가는 삶이 최선이기를 믿고 바라며 살아가는 내 모습 뒤편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들 제비와 너무 닮은 듯 하여 마음이 아프다.
손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림을 그리며 슬퍼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본능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땅바닥에 부딪힐 듯 낮게 날다가 급하게 하늘로 비상해 오르는 제비들의 비행훈련 모습을 보며 며칠씩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날아갈 그들의 삶의 의지를 본다.
제비의 죽음을 보고 충격에 상심하고 있는 아직은 여린 손녀딸이 할아버지 할머니 눈에는 안쓰럽기만 하다. 손녀 딸 아가야 너도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거라. 그리고 튼튼해야지. 제비가 날아가는 창공처럼 이 드넓은 세상을 너도 씩씩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겠니. 여기까지 쓰다 보니 할애비인 내 눈이 자꾸만 흐려져서 글을 이어갈 수가 없어 이만 끝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당장에 손녀의 근황이 궁금하여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