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비축 논란
이란을 둘러싼 중동 지역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호주의 연료 비축 수준과 에너지 안보 취약성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에너지장관 크리스 보웬(Chris Bowen)은 3일 연방의회 질의응답에서 현재 호주의 연료 보유량을 공개하며 우려를 일축했지만, 국제 기준에는 여전히 크게 못 미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보웬 장관은 디젤 34일, 제트연료 32일, 휘발유 36일분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수치는 지난 15년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연료는 많을수록 좋다”고 말했다.
다만 호주는 국제에너지기구(IEA-International Energy Agency) 가입국으로서 순수입 기준 최소 90일치 원유 및 정제연료 비축 의무가 있으나, 10년 넘게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보웬 장관은 현재 수치가 국내 최소비축의무(MSO-Minimum Stockholding Obligations)는 충족한다고 설명했지만, IEA 기준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는 점은 인정됐다.
그는 또 연립당(Coalition)의 과거 연료 비축 정책을 비판하며 “정권 교체 당시 재고가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에 저장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곳이 ‘멕시코만(The Gulf of Mexico)’이든 다른 이름이든, ‘호주만’은 아니다”라고 농담을 덧붙이며 해외 저장 의존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 수치에는 호주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있는 선박 적재분도 포함된다고 이후 정정했다.

호르무즈 해협 위기
시장과 전문가들이 특히 우려하는 지점은 오만과 이란 사이 33km 폭의 해상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이다. 이 해협은 전 세계 원유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초크포인트’로 꼽힌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United State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에 따르면 하루 약 2000만 배럴의 원유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이란 혁명수비대(IRGC-Islamic Revolutionary Guard Corps)는 최근 해협 인근의 영국·미국 유조선 3척이 미사일 공격을 받아 화재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국제 해사당국도 3척이 피격됐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나 세부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란은 아직 공식적으로 해협 봉쇄 계획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이 확대되면서 봉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은 이번 작전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이란 해군이라고 밝히며 해협 폐쇄를 막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유가 향방과 영향
AMP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셰인 올리버(Shane Oliver)는 이번 사태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보다 공급 차질 측면에서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된다면 글로벌 원유 공급의 20%가 사라질 수 있다”며 “그 경우 배럴당 US$100을 쉽게 넘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약 US$67 수준이다.
올리버는 배럴당 US$1 상승은 호주 내 휘발유 가격 리터당 약 1센트 인상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즉, 국제 유가가 US$10 오르면 국내 휘발유 가격은 약 10센트 상승하는 구조다. 그는 “유가 상승은 소비지출에 대한 일종의 세금”이라며 가계 부담 증가를 경고했다.
마커스투데이(Marcus Today)의 선임 시장분석가 헨리 제닝스(Henry Jennings) 역시 “해협이 막히면 단기적으로 US$90까지 급등할 수 있다”며 “향후 며칠 내 상대적으로 저렴할 때 주유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22년 러시아 침공 직후 국제 유가는 배럴당 US$120을 넘었고, 당시 호주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를 크게 웃돌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더 많은 주요 산유국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더 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연료 수입 의존도
호주는 현재 가동 중인 정유소가 2곳뿐이며, 연료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주요 수입국은 한국, 싱가포르, 일본, 말레이시아 등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 역시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고 있어, 결국 공급망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구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호주의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수입 모델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당시 유가 급등으로 국내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를 훌쩍 넘기며 소비자 부담이 크게 늘었다.
야당 외교·에너지 담당 의원들은 수년간 연료 비축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지적해왔다. 테드 오브라이언(Ted O’Brien)은 “전기요금 문제뿐 아니라 액체연료 문제도 심각하다”며 “에너지 안보는 국가안보다”라고 말했다. 댄 테한(Dan Tehan)도 정부가 연료 비축 문제보다 다른 사안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Australian Strategic Policy Institute)의 국가안보 프로그램 책임자 존 코인(John Coyne)은 “호주는 무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라며 장기 공급 차질 시 경제 전반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농업을 예로 들며 “연료비 상승은 가공, 운송 등 모든 공급망 단계에 비용 증가를 초래해 슈퍼마켓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라탄연구소(Grattan Institute)의 에너지 전문가 토니 우드(Tony Wood) 역시 “유가와 휘발유 가격은 소비자에게 빠르게 전가된다”며 정부가 공급 위험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주유 행렬
이 같은 우려 속에 멜번(Melbourne)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유소 앞에 긴 차량 행렬이 형성됐다. 한 멜번 주민은 SNS에 “동네 주유소 줄이 1km를 넘었다”고 적었다. 온라인에서는 이를 ‘패닉 바잉(panic buying)’으로 보는 반응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당장 물리적으로 연료가 고갈될 가능성은 낮다고 보면서도, 심리적 불안이 가격 상승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중동 체류 교민 영향
한편 외교장관 페니 웡(Penny Wong)은 중동 지역에 약 11만5000명의 호주인이 체류 중이며, 에티하드항공(Etihad Airways), 에미레이트항공(Emirates), 카타르항공(Qatar Airways)을 통해 약 1만1000명이 출입국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항공편 취소와 영공 폐쇄로 이동이 제한된 상태다. 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에 체류 중인 자국민을 위해 등록 포털을 개설했으며, 상업 항공편 운항 재개 여부를 지켜본 뒤 추가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웡 장관은 “지금 문제는 누가 비행하느냐가 아니라, 비행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며 “상업 항공편을 통한 귀국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경미(Caty)기자 kyungmi@koreanherald.com.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