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출신 교황 나올까
서부 시드니 켈리빌(Kellyville)에 위치한 로자리오 성당(Our Lady of the Rosary Church)에서는 매주 일요일, 필리핀 교민들이 미사에 참석한다. 성가대는 영어, 타갈로그어(Tagalog), 라틴어로 찬송가를 부르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 앞에는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을 추모하는 제단이 마련돼 있고, 그의 환한 미소가 담긴 작은 액자가 놓여있다.
이 공동체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스러운 절차, 콘클라베(conclave)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필리핀 출신의 루이스 타글레(Luis Tagle) 추기경이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미국 출신의 후보들도 있다.
타글레 추기경이 선출된다면, 그는 역사상 첫 아시아 출신 교황이 된다. 성당 청년회 리더 이안 에폰둘란(Ian Epondulan)은 “필리핀 커뮤니티 안에서도 이번 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많은 추측이 오가고 있다”고 전했다. “타글레 추기경처럼 필리핀 출신 교황이 탄생할지 매우 기대된다”며 “하지만 필리핀뿐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콘클라베에 들어가는 추기경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교황이 필리핀에서 나오든, 이탈리아에서 나오든, 다른 나라에서 나오든, 추기경단은 옳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 믿습니다.”

13세기부터 이어진 전통
콘클라베는 바티칸 시국(Vatican City) 내 시스틴 성당(Sistine Chapel)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진행된다.
추기경단은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선거권을 가진 133명의 추기경들은 비밀 투표로 새 교황을 선출한다. 선출이 완료되면 시스틴 성당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곧이어 광장에 모인 신자들은 새로운 교황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이 선출 방식은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Pope Gregory X)에 의해 공식화된 이래로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 유럽, 특히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이 참석했지만, 이번 콘클라베에는 전 세계 72개국에서 온 추기경들이 참여한다. 이들은 모두 교황 후보가 될 수 있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다양한 인종과 지역으로 구성된 이번 콘클라베는 교황 선출뿐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미래 방향에도 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조반니 바티스타 레, 콘클라베 감독
이번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은 교황청 추기경단의 수장인 조반니 바티스타 레(Giovanni Battista Re) 추기경이다.
그는 1957년, 23세의 나이로 성직에 임명된 이후 60년 넘게 바티칸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중요한 직책을 맡아온 이탈리아 출신의 고위 성직자이다. 그는 교황청에서 교황의 최고 참모인 ‘일반업무 대리’를 11년간 역임하며, 교황의 정책을 수행하고 교회 내 주요 인사들을 관리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레 추기경은 이번 콘클라베에서 투표를 하지 못한다. 91세로 나이가 많아, 80세 이상인 추기경은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레 추기경은 이미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o) 교황 서거 이후부터 진행된 바티칸 내 회의들을 감독하며, 교황 선출 절차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지휘하고 있다. 이러한 회의에서는 새로운 교황 후보자들의 입지가 시험대에 오르기도 한다.
케빈 패럴, 카메를렌고
교황 선출을 위한 중요한 의식에서 카메를렌고(Camerlengo) 직책을 맡은 것은 77세의 케빈 패럴(Kevin Farrell) 추기경이다.
교황 서거 이후, 그는 교황청의 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교황 선출이 이루어질 때까지 교황청을 이끌게 된다. 또한, 콘클라베 준비와 투표 과정이 전통대로 이루어지도록 보장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가톨릭 세계화의 역사
가톨릭 초창기 천 년 동안, 성직자는 동료 성직자, 정치 지도자, 로마 시민들에 의해 선출됐다.
추기경단(College of Cardinals)은 1150년에 결성됐고, 15세기까지 그 수는 30명을 넘지 않았다. 오랫동안 추기경은 로마 고위 성직자들에게만 수여됐다. 하지만 가톨릭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이탈리아 외 지역 출신도 추기경이 될 수 있게 됐고, 20세기부터 점차 다양성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266명의 교황 중 217명이 현재의 이탈리아 지역 출신이었다.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는 교회를 현대화하고 국제화했다. 당시 교황 요한 23세(Pope John XXIII)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자”며 개혁을 추진했고, 이후 교황 바오로 6세(Pope Paul VI)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는 전 세계 각국에서 추기경을 임명했다.
2013년 선출된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하며 76개국에서 163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다.

프란치스코의 유산
12년 간의 재임 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거권을 가진 135명 중 80%를 자신이 임명한 인물들로 채웠다.
정치‧법 이론 학자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와 예일 법대에서 수학한 베네딕트 콜레리지(Benedict Coleridge)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장 눈에 띄는 업적 중 하나는 교황 선출 시스템을 국제화한 것”이라며 “이는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황 후보로서 전통적으로 주목받지 않던 인물들, 알려지지 않은 교구 출신 추기경들을 임명하며 기존 권력 중심의 구조를 탈피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 중 25명은 과거 추기경단에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던 국가 출신이다. 아이티(Haiti), 동티모르(Timor Leste), 미얀마(Myanmar),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 통가(Tonga), 스웨덴(Sweden) 등이 그 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Malaysia), 예루살렘(Jerusalem), 몽골(Mongolia) 등 소수 가톨릭 공동체를 섬기는 지도자들이기도 하다.
콜레리지 박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며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을 실천하는 모든 곳이 중심이며, 교회는 그러한 관점으로 교회 자체를 바라봐야 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다음 교황의 조건은
지리적으로 다양한 이번 콘클라베에서는 유럽 외 지역 출신 교황이 선출될 가능성이 크다.
각 추기경이 가진 사회적‧정치적 성향은 다르지만, 유럽 외 출신 추기경들은 공통된 우선순위를 공유할 가능성이 있다고 콜레리지 박사는 분석했다. 그는 최근 영화 콘클라베(Conclave) 속 카불(Kabul) 추기경이 전쟁과 고통에 대해 연설하는 장면을 언급하며 “실제 콘클라베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추기경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는 이스라엘-가자 휴전 중 인질 교환을 위해 자신을 제안한 인물이고, 라바트(Rabat, 모로코) 추기경은 이슬람과의 종교 간 대화의 최전선에 있었다”며 “이들은 각자의 사회를 대표해 매우 강력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전했다.
가자(Gaza), 우크라이나(Ukraine), 수단(Sudan) 등지에서 전쟁이 지속되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경험을 가진 지도자는 앞으로 더욱 필요한 인물로 여겨질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소재 홀리 크로스 대학(College of the Holy Cross)의 종교학 명예교수 조앤 피어스(Joanne Pierce)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유럽이나 북미 외 지역에서의 사목 경험은 교황 후보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며 “하지만 행정 경험, 교육 수준, 교리 해석 능력 등도 종합적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 위기도 주요쟁점
이번 콘클라베에서는 기후변화도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될 전망이다. 특히 태평양 지역 추기경들은 기후 위기를 실제로 체감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 추기경은 언론에 “자신의 투표는 태평양 지역 가톨릭 신자들의 이익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내내 기후 불평등 문제를 강조해왔다. 이를 이어받으려는 추기경들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어스 교수는 “동티모르와 태평양 지역 추기경들은 인접국가들의 운명에 관심이 깊을 것”이라며 “투발루(Tuvalu)와 키리바시(Kiribati)는 해수면 상승으로 실존 위협을 받고 있고, 동남아시아도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추기경들에게는 환경 문제가 그리 시급하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해당 지역의 추기경들은 지금 당장 미래를 대비할 필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교회 중심, 남반구로 이동 중
콘클라베의 구성만큼이나, 가톨릭 교회의 중심도 변하고 있다. 피어스 교수는 “누가 교황이 되든, 가톨릭 교회의 얼굴은 이미 변하고 있다”며 “남미,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아시아 일부,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가톨릭 신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장 지역에서 교황이 배출된다면, 그 지역 공동체에 엄청난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문화에서 자라고 지역 문제를 잘 아는 교황은, 그 공동체가 전 세계 가톨릭의 핵심으로 인정받았다는 신호가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교황이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는 중요한 존재다’라는 의미가 된다.”
한편, 호주에서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대공황 이래 최저인 20%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 내 이민자 공동체는 활발히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필리핀계 청년 리더 에폰둘란은 이번 콘클라베를 통해 자신의 공동체가 더 넓은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인으로서 우리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연결된 보편적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라며 “호주의 가톨릭 교회 역시 변화하고 있으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경미(Caty)기자 kyungmi@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