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놈, 이었지만, 죽을 놈은 아니었어요”
볼트.
정비사 출신의 가수 지망생이 오디션 무대에서 손에 쥐고 있던 볼트. 앳된 청년의 열창이 계속되는 동안 윤석은 그 작고 단단한 금속 부품만 생각했다. 저렇게 손에 아무거라도 쥐고 있다면, 쥘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겠구나. 하다못해 호두라든가, 아니면 어릴 적 문방구에서 팔던 유리구슬이라든가. 그는 자기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김영하 단편소설 ‘아이를 찾습니다’ 첫 문단)
김영하 소설 속 인물인 윤석은 아이를 잃어버린 아빠다. TV를 보는데, 그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고, 앳된 청년의 순서였고, 그 청년이 마이크보다 더 절박하게 쥐고 있는 게 볼트라는 것을 확인했으리라. 정비사 출신이었기에 볼트가 손에 그냥 그렇게 쥐어져 있었는지, 아니면 늘 지니고 다녔기에 긴장감을 풀기 위해 거기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절박한 심정을 아무에게나 아니 아무것에나 빌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소설 속 아이를 잃어버린 아빠 윤석은 알았을 것이다. 그저 살기는 살아야 하는데 이럴 때, 볼트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조차 의지하고 싶어지게 될 줄을. 그래서 빈손을 보게 될 줄을.
자기 빈손을 내려다봐야 하는 상황이 이렇게 올 줄 몰랐다. 예전에는 극단 배우 오디션을 몰아서 했다. 한두 명 보는 것보다는 몇 명이라도 그룹으로 모이면 한꺼번에 보았는데 요즘은 시작하고 싶은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수시로 오디션을 한다. 얼마 전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 지망생이 기출대사 연기가 끝나고 바로 즉흥극 테스트를 들어간다고 하니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즉흥극이란 대본 없이 장면에 대한 상황을 듣고 배우가 바로 연기하는 것이어서 기존 배우들도 즉흥극은 쉽지 않게 본다.
배우 지망생의 즉흥극 내용의 전말은 이렇다. 친한 여자 친구가 자신의 사랑하는 남자와 바람을 핀 것을 알았다. 너무 화가 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여자 친구이다. 그 여자 친구가 울면서 말을 못 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는데 죽었다고 한다. 자신은 살아서 전화로 그 사실을 알리는 상황이었다.
“막장 드라마네요.” 한 배우가 이렇게 말해서 모두 웃었지만, 배우지망생은 웃지 못하고 있다. 오디션을 보는 중이기에, 감정을 잡아야 하기에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조용히.
“상대 배우 목소리 좀 넣어주세요”라고 주문한다.
배우 한 명이 전화 목소리로 다급하지 않게 울먹이면서 “상호씨가, 상호씨가… 차를… 타고 가는데… 차가 사고가 나서… 그래서 (계속 울먹인다. 하도 울어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에서 ) 죽, 었, 어.”
배우 지망생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디션을 지켜보고 있던 이유 극단 배우들도 숨을 멈춘 채 지켜보았다. 어떤 말을 할까 어떤 행동을 할까 궁금해 하면서.
연습실 뒤편에 걸려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릴 뿐,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조용히 배우 지망생의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그녀 손안에 들려있던 기출대사 종이가 ‘흐드득’ 소리를 내며 같이 운다.
조용히 흘러내린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여기까지입니다”라며 고개를 숙인 배우 지망생은 자신의 행동에 관해 설명했다.
“사실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정말 죽일 놈이죠. 사랑했는데 그것도 내 친구랑 바람이 나다니 죽일 놈인데, 그것보다도 죽었다고 하니깐 나쁜 짓 했던 것은 생각이 안 나고 죽음만 생각했어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잖아요”
종이.
오디션을 본 배우 지망생은 즉흥극 무대에서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손이 아프도록 꽉 단단히 쥐면서, 연기란 설명이 아닌, 보여줘야 한다는 상황을 보여줬다. 죽일놈이지만 죽어서는 안 되는 놈이었다는 것을.
김영하 소설 속 정비사 출신의 가수 지망생처럼, 아이를 잃어버린 아빠 윤석처럼, 뭐라도 손에 있어서 그것이 뭐든, 그것이 나중에 뭐가 되었든, 지금의 처지를 조금은, 아주 조금은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면 알 것이다. 그것이 뭔지를.
강해연 / 이유 프로덕션 & 이유 극단(EU Production & EU Theatre) 연출 감독으로 그동안 ‘3S’, ‘아줌마 시대’, ‘구운몽’ 등의 연극과 ‘리허설 10 분 전’, ‘추억을 찍다’ 등의 뮤지컬, ‘Sydney Korean Festival’, ‘K-Pop Love Concert’ 외 다수의 공연을 기획,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