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甲乙)정국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던 지난 가을의 어느 날, 필자는 정원의 한 구석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화단엔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바로 그 옆에서 자라난 덩굴이 담장을 타고 올라가 나무를 온통 뒤덮은 것이었다. 나무의 잔가지들과 질기게 얽힌 덩굴을 제거하려면 나무 역시 태반이 잘려나갈 것이기에 오랫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터였다. 무성한 덩굴의 이파리들을 이기지 못하고 한없이 축 쳐져버린 야윈 나무가 못내 마음에 걸려 결국 전정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에 걸쳐 덩굴 전체를 들어내 버렸다. 그러나 막상 황폐해진 나무의 모양새가 볼수록 참담해서 진즉 돌보아 주지 못한 것이 민망하면서도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겨우내 눈길이 그리로 향할 때마다 필자는 갑을목(甲乙木)의 원리를 상기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고위층의 갑질 논란들 때문에 언젠가부터 한국에선 ‘갑을’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우열을 가리는 불편한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갑을병정으로 시작되는 십간에서 유래하였으며 그 본래의 의미는 갑을관계의 병폐 따위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갑과 을은 천간, 즉 하늘에 드리운 일종의 기운으로서 그 속성이 목(木)과 유사하기에 명리학에서는 흔히 갑목 혹은 을목이라 불리며 이 두 기운은 상반된 목기를 띈다. 가령 갑목은 천년 묵은 소나무에 비유되는데 십간의 선두이므로 항상 가장 앞서가는 성격을 지닌다. 언제나 일등이어야 하며 이등이란 의미가 없다. 때문에 갑목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도 높지만 열심으로 말한다면 갑목을 당할 사람이 없다. 오직 앞만 바라보며 달린다.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목기가 성할 뿐더러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러한 갑목의 기운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은 뭐든지 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매사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갑목이 꼿꼿한 소나무라면 을목은 구불구불한 화초나 넝쿨 식물에 가깝다. 나무는 나문데 위로 자라기보다는 옆으로 뻗어나가는 기질이다. 큰 나무에 붙어 기생하거나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돋아나는 잡초의 속성을 띈다. 갑목이 죽거나 말거나 사정없이 감고 올라가는 탓에 을목은 갑목을 기꺼워하지만 갑목이 을목을 만나면 상당히 골치가 아프다. 을목은 일종의 생활력이라, 을목의 기운을 받은 자는 인내심이 많고 이해타산도 빠르며 인색하기까지 하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은 을목에게 해당된다. 대단한 생명력과 환경적응력의 소유자이므로 나서진 않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늘 을목이다. 피라미드 마케팅같은 것을 처음 고안한 사람은 아마 을목이었을 것이다. 갑목은 애초에 그런 발상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갑목과 을목은 같은 목기이면서도 매우 상이한 성질을 유지하며 상생과 상극의 써클 안에서 공존한다. (물론 어느 편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각자의 장단점이 시간과 환경의 영향에 의해 뒤바뀔 수는 있다.)
필자가 정원의 덩굴을 쳐내버린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을목으로 인해 갑목의 생명이 곧 끝장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자 필자는 대수술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국기문란 사태를 초래한 최순실 게이트는 두 목기의 공생과 너무도 흡사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야말로 갑목과 을목이다.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양지의 권력과 음지의 실세, 청와대 입성과 부정 축재로 표상되는 두 여인의 삶은 이처럼 고아한 하늘의 이치를 극명하게 입증한 사례이다. 그들이 설마 명리학의 이론을 알았을 리 만무하지만- 만일 알았다면 이처럼 자기 자신을 욕망의 바다에 허무하게 내던질 수 있었으랴?- 언젠가 박대통령 스스로도 ‘우주의 기운’을 운운했던 것처럼 천지의 조화란 원초적으로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우주로부터 기인하여 참으로 질서 정연한 별들의 운행 속에서 냉철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역이 지정해준 범위 내에서 만사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때론 순차적으로 때론 드라마틱하게 결론을 향해 치달릴 뿐이다.
유불도와 기독교를 모두 섭렵했다는 최태민씨는 생전에 이처럼 단순한 이치도 영애와 딸들에게 주입하지 못했던가 보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 필자가 확인한 최태민씨의 사주는 대체로 사교의 교주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춘 교주 팔자의 정석으로서 그는 대단한 투시력과 영발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괜히 이미지만 나빠진 전국의 목회자들과 무속인들의 항의가 언론사들을 향해 빗발쳤다고 하는데 사실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일이다. 최태민씨가 처음부터 성직자였던가? 그는 왜정 시대에 순사도 했고 해방 후엔 경찰도 했다. 그 외에도 딱히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청와대에 드나들기 전까지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한 이력이 있다. 더욱이 재물과 여인에 환장한 사주인만큼 필시 조금이라도 돈 냄새가 풍기면 무슨 일이건 가리지 않고 돌진했었을 것이다. 타고난 사주의 그릇이 워낙 크고 운까지 잘 따라주었으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구절을 온 몸으로 실천한 자수성가형 비즈니스맨으로 보면 적당하겠다.
최씨 일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말들이 세간에 무성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숭배했던 것은 종교나 철학의 성스러운 말씀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래서 그간의 ‘혼이 없는’ 만행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철저하게 갑목을 옥죄며 기생하는 을목들로서 갑목의 사활에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관심도 가졌을 리 없다. 여기서 갑목의 한계가 드러난다. 을목에 의해 일단 꺾인 갑목은 부활하지 못한다. 쓰러진 소나무를 연상해보라. 좌절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젊은 엘리트들처럼 너무 위로, 앞으로 자라는 데만 온힘을 쏟다보니 재기할 힘이 없다. 위기의 순간에, 돌아가는 융통성도 없고 차분히 사태를 살피는 여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갑목은 영원한 갑목이라 곧 죽어도 자존심은 못 버린다. 필자는 평생 을목들의 통제 속에서 살아온 박 대통령에게 자아를 뛰어넘는 거국적 이념이 있었을지 생각해본다. 만일 있었다면 ‘통일대박’이라는 매우 장사치스러운 말을 그처럼 당당하게 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갑목은 결코 대박같은 을목스러운 말을 입에 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곧 한여름인데도 필자의 나무는 여전히 앙상한 채로 남아 있다. 잘려나간 가지들로부턴 다시 새싹이 돋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생각하였던 덩굴은 어느 틈에 다시 자라나서 파란 잎새들이 다시 화단을 뒤덮기 시작했다. 좀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초기에 생각 없이 내버려 둔 것이 이처럼 예상 밖의 결과를 부를 줄은 몰랐다. 만일 나무가 영영 소생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덩굴의 기둥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즉 원래의 갑목을 포기하는 대신 을목에게 갑목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갑을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최후의 순간엔 이렇듯 둘의 위치가 역전될 수도 있다. 하여 갑목은 을목에게 단호히 대처하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순간의 편안함과 달콤함에 현혹되어 자신의 뿌리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면 사지를 잘라내는 결단도 때로는 피할 수 없는 법이다.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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