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트렌드를 다 잡는 떡문화 탄생 기대
동방식품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진동한다. 고소한 냄새가 3대를 이어온 전통을 말해주듯이 진하고 깊다.
지난 1983년에 호주 시드니에 방앗간을 연 후 39년째 떡을 만들고 있는 동방식품. 70년대 초반, 이른바 ‘구포’라 불리는 1세대 이민자로 호주 동포사회의 산증인이기도 한 1대 박창욱 대표는 집 뒷마당에 기계를 들여놓고 가내 업으로 방앗간을 시작하여 지금은 1,500스퀘어 미터의 부지를 가진 공장의 규모로 사업체를 성장시켰다.
처음 동방식품이 탄생한 곳은 벨모아 라켐바 스트리트 65번지이다. 뒷마당을 사용하기 위해 집을 세 채까지 늘려가던, ‘뒷마당 떡집’이 어엿한 공장이 될 때까지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이 주7일, 1년 365일, 주말에는 새벽 3시부터, 보통 때도 오전 대 여섯 시만 되면 방앗간 기계를 돌려 시드니 전 지역에 식품점뿐 아니라 퍼스, 아들레이드, 케언스에까지 떡을 실어 날랐다.
동방식품은 중국 커뮤니티로 가래떡을 처음 납품한 곳으로 시드니 내에 상해 사람들에게 동방식품 가래떡은 ‘빨간색 봉투’로 통한다. “빨간색 이미지가 들어 있는 동방식품 떡이 제일 맛있다”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단다.
50대 장년이었던 1대 박창욱 대표가 80 노인이 될 때까지 사업은 큰 기복 없이 순탄했다. 방앗간 일은 동포사회가 커지는 속도대로 쭉쭉 자라 갔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아이템을 잘 잡은’ 것이다.
하지만 유언비어라 할지, 이런저런 음해성 말들로 인해 맘고생도 했다. ‘순 쌀로만 만들었는데 이렇게 쫄깃할 수 있냐, 분명 다른 뭘 섞었을 것이라는 둥, 조미료를 탄다는 둥, 쑥떡에다가 시금치를 넣는 것 아니냐며 호주에서 어떻게 그 많은 쑥을 구할 수 있느냐는 둥 해괴한 소리가 들리곤 했다.
사람 입에 들어가는 것을 취급하다 보니 음해와 모함에 시달리고 공연한 해코지를 당할 때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고충이다.
그러나 “우리 집 세 딸은 동방 떡만 먹고 자랐다”라거나 “동방 떡이 아니면 안 먹는다”는 손님들의 덕담을 들을 때면 보람도 크다.
26년 동안 연중무휴 쉴 틈 없이 달려온 1대 박창욱대표와 부인은 200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셨고 큰아들인 박종화대표가 사업을 물려받아 경영해왔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호주에 온 큰 아들 박종화 대표는 아버님이 처음 동방식품을 문 연 이래 줄곧 방앗간 일을 도우며 39년의 역사를 함께 해왔다.
2대 박종화 대표는 근 40년을 방앗간 기계가 돌아가듯 쉬지 않고 달려왔으며 이제 3대에 걸쳐, 동방식품에 명성을 다시 한번 빛내기 위해 새로운 도약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그의 얼굴에는 지난 40년 세월의 노하우와 명맥을 이어나가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찼다.
“3대 전통을 이어갈 대표와 함께 새로운 모델을 접목해서 트렌드에 맞춰 변화하는 떡 문화를 만들고 싶다” 라고 했다.
2대 박종화 대표도 기존의 떡보다 기술적인 면이나 모든 면에서 한 층 업그레이드된 품질로 승부할 것으로 기대한다.
40년의 전통을 이어온 동방식품을 앞으로 개혁·경영한다는 게 많은 책임감이 따르고 부담도 되지만 지금까지 미뤄왔던 소셜 미디어를 통한 마케팅을 시작하고 이를 통해 동방식품 떡을 널리 알리고, 또한 한국의 떡 트렌드에 맞춰 맞춤형 디자인 라이스 케이크이나 웨딩 케이크 제작, 작은 떡 카페를 시드니 나아가 호주 곳곳에 열고 싶다며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다. 현재 K-Food 열풍에 힘입어 호주에 있는 중국 등 아시안인들 나아가 호주 현지인들에게 떡을 널리 알리는 게 목표이다.
동방식품이란 이름이 새겨진 네대의 밴은 오늘도 시내 구석구석을 누빈다. 호주 땅에 우리의 입맛을 지켜가며 주류사회에까지 ‘한국의 맛’을 알리기 위해 시드니의 새벽을 깨워왔던 박종화 대표와 함께 제 3대 대표는 그가 펼쳐가는 전통과 새로운 트렌드를 어떻게 접목해 나갈지 그 새로운 내일을 함께 지켜보는 일 또한 어쩌면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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