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igration Restriction Act’, 연방 구성 후 의회가 제정한 첫 법률 중 하나
비유럽인 이주 제한한 백호주의, ‘금지된 이민자’는 유럽 언어로 ‘받아쓰기’ 시험 시행
비백인계 국가 출신의 이민자 유입을 막은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은 1978년까지 이어진 백인 우선 이민 정책이다. 1901년 1월 1일, NSW를 비롯한 각 식민지가 호주 연방을 구성하고 공식 국가로 출범한 이래 이 정책을 담은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은 백인 이외, 특히 아시아계 이민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영국 앵글로색슨계를 비롯해 기독교 배경의 백인들에게만 호주로의 이민을 허용한 것이다. 호주의 이 정책은 사회-문화적으로 백인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18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이 정책은 1966년 들어선 헤롤드 홀트(Harold Holt) 정부 때부터 점차 축소되었으며 노동당 고프 휘틀럼(Gough Whitlam) 정부 당시인 1978년 완전히 폐지됐다. 이어 호주는 다문화 정책을 도입,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을 법률로 제정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 초기 법률
호주의 이민 제한법(‘Immigration Restriction Act’)은 1901년 연방 출범 이후 의회에서 통과시킨 최초의 법률 중 하나이다. 이 새로운 법률은 ‘누가 호주로 이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제공했다. 이 법에 따라 ‘금지된 이민자’(prohibited immigrant)로 확인된 이민 신청자에게는 유럽 언어의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1899년까지 호주 6개 식민지가 연방을 구성하기로 합의한 이유 중 하나는 일자리를 놓고 ‘값싼’ 비백인 노동자들과 각 식민지 거주민들이 불공정하게 경쟁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지금의 6개 주(State)인 당시 식민지 거주민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두려움과 이기심이 결합되어 중국, 태평양 섬 국가 출신 노동자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 White Australia
당시 각 식민지 거주민들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유색인종에 대한 이민 제한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정책과 ‘White Australia’ 사이에는 명확한 연관성이 있는 셈이다. 이의 목적은 ‘유색인종은 호주에서 내보내고 백인 인종만으로 호주 국민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애초 유색인종의 ‘값싼 노동력’에 대한 우려와 백인들이 일자리를 차지하려는 이기심이었으며, 또한 당시 호주의 주류층인 백인들이 갖고 있던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지배적인 태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는 당시 석공(stonemason)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노동당(Labor Party)의 강령과 일치하기도 한다. 1901년 2월 16일 자 ‘Bulletin’은 이(노동당 강령)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주요 정책은 백인 호주이다. 이에 대해 타협이란 건 없다. 노동자 계층의 유색인종 형제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Our chief plank is, of course, a White Australia. There’s no compromise about that. The industrious coloured brother has to go ‘and remain away!’).
■ 연방 초기의 한 사례
중국계인 제임스 프랜시스 키친 미나한(James Francis Kitchen Minahan)은 빅토리아(Victoria) 식민지에서 태어난 후 5살 때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1800년대 중반, 특히 빅토리아 주에서의 금광 발견은 많은 수의 중국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자란 그는 호주 연방 출범 8년이 되던 1908년, 31세의 나이에 호주로 돌아왔다.
이미 이민 제한법이 시행되던 터여서 미나한에 대한 연방정부의 태도는 단호했고, 그는 ‘금지된 이민자’로 체포됐다.
그는 자신의 체포에 대해 빅토리아 법원과 고등법원(High Court)에 항소했고, 궁극적으로 호주에 머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누가 호주사회의 일원인지에 대한 사회적 의문을 제기했다. 출생시 영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또 어머니가 영국 시민인 사람이 피부색으로 인해 ‘금지된 이민자’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 안전한 귀환
이민 제한법, 즉 백호주의 정책이 시행되면서 해외로 나가는 비유럽인은 출국 전, 유럽 언어의 받아쓰기 시험 면제 증명서(Certificate of Exemption from the Dictation Test. CEDT)를 발급받아야 이 시험 없이도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골드러시 기간, 호주에는 3만 8,000명 이상의 중국계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CEDT는 백호주의 정책에 따라 호주 입국이 금지된 많은 이들이 호주에서 태어났거나 호주에 장기 거주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 시험 시기
받아쓰기 시험은 호주 전역의 항구에 있는 세관 직원들에 의해 실시됐다. 호주로 입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었지만 호주 정부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이민자’(undesirable immigrants)로 분류된 이들은 50단어 분량의 단어를 기술해야 했다.
이 시험에 실패한 이들은 입국이 거부되거나 추방됐다. 시험이 시행된 초기, 받아쓰기 시험을 치러야 했던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통과하지 못했다.
■ 정치 만평
연방 구성 이후 몇 년 동안 호주 정부는 국가 경제를 더욱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1911년부터 영국에서는 ‘적절한 유형’(right type)의 이민자를 유치하도록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던 중 1936년에 나온 한 만평(cartoon)은 받아쓰기 시험에 대한 호주사회의 변화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시험은 호주가 특정 인종의 사람들을 ‘undesirable immigrants’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 차별’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위선적 정책은 곧 인정됐다.
이 받아쓰기 시험은 대부분의 비유럽인이 1958년까지 호주로 이주해 정착하는 것을 막았다.
■ 변화의 시기
비유럽계를 대상으로 한 받아쓰기 시험은 1958년 이후 시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호주가 차별 없는 이민 정책을 채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 정부는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규모 이민 프로그램을 채택했고, 호주사회에서 인종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법적 변화로 이어졌다.
1975년, 마침내 호주 의회는 인종차별금지법(Racial Discrimination Act)을 통괴시켰다. 이로써 호주로 이주하려는 이들에 대한 결정에서 ‘특정 인종이나 민족’을 제한으로 삼는 근거가 사라지게 됐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