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오락이자 갖가지 해악과 비극의 원천이었던 호주인의 음주… “술에 젖은 국가였다”
오늘날 커피처럼 럼으로 시작된 하루… 식민 초기 원주민들, 술로 인한 파괴적 영향 ‘상당’
1901년 호주 연방이 구성되고 초대 총리 자리에 앉은 에드먼드 바튼(Edmund ‘Toby’ Barton)은 많은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리더이자 선경지명이 있었던 지도자로, 그의 사망을 알리는 많은 부고 기사(obituary) 중 하나가 요약했든 ‘위대한 호주인’(a great Australian)이었다.
‘Rum: A Distilled History of Colonial Australia’이라는 책을 저술한 역사가이자 작가인 매트 머피(Matt Murphy)씨는 바튼 전 총리에 대해 “완전히 술에 취해 있던”(an outright drunk) 사람이기도 했다며 “우리(호주)의 초기 의회를 보면, 술에 취한 상태로 의회에서 일을 하는 것이 ‘그냥’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바튼 전 총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호주는 술에 젖어 있던 나라였으며, 음주는 ‘국민 오락’이자 갖가지 해악과 비극의 원천이었다.
술은 식민지의 뿌리?
236년 전인 1788년, 아서 필립(Arthur Phillip)이 이끄는 제1함대(First Fleet)가 약 700여 명의 영국 죄수와 함께 관리자, 군인들을 데리고 호주에 도착했을 때, 그의 함선에 실려 있던 화물을 보면, 호주가 어떤 나라가 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지금의 시드니 코브(Sydney Cove)에 도착, NSW 식민지를 선포하고 초대 총독이 된 그는, 영국을 출발하기 전, 농산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은 (호주의) 기후 조건을 대비해 신중한 고려 끝에 2년치 식량을 새 정착지로 가져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함선에 4년치 럼주(rum)를 실었다.
머피씨의 책(‘Rum: A Distilled History of Colonial Australia’)을 보면 ‘제1함대를 호위하는 해군은 고집을 부렸고, 결국 4년치 럼주를 배에 실었다… (하지만 이 럼주는) 4년도 가지 못했다’는 부분이 있다.
NSW 식민지 초기 수십 년 동안, 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과장하기는 어렵다. 머피씨는 “술은 화폐였다. 무언가를 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 비용을 지불했을까. 바로 술이었다”고 설명했다.
NSW 식민지에 주둔한 영국군 상설부대인 ‘NSW Corps’(당시는 군인이 치안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술에 대한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했기에 ‘럼 부대’(Rum Corps)로 불리기도 했다.
식민지가 점점 성장하면서 럼주는 호주 현지에서 만들어지게 됐다. 하지만 이 술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럼이 아니었다.
머피씨는 “럼은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감자로 럼을 만들고 복숭아로 럼을 빚어냈다. 사람들의 뒷마당에는 이렇게 마구 만들어낸 술과 술을 빚는데 사용됐던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사람들은 이 술을 마시고 죽거나 눈이 멀게 되는 일도 발생했다. 꽤 끔찍한 일이었다”며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커피가 필요한 것처럼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럼주가 필요했다”고 기술했다.
식민지 초기 몇 년 동안, 그로그주(grog. 럼주에 물을 탄 술)가 원주민들에게 소개되었고, 알코올을 마신 적이 없던 원주민들에게 술은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가 진행되면 럼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다른 종류의 알코올에 눈을 돌렸다. 당시 식민지 전체에 술로 인해 사회, 경제, 보건 문제가 발생하자 식민 정부는 사람들의 음주 습관을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엇갈렸다.
‘six o’clock swill’로 알려진
음주 억제 규칙
연방이 출범한 지 16년 후, 정부는 호주인의 음주를 통제하고자 ‘모든 술집은 오후 6시에 문을 닫아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커틴대학교(Curtin University) 약물조사연구소인 ‘National Drug Research Institute’ 겸임 교수이자 임상 심리학자 리차드 미드포드(Richard Midford) 박사는 “(이 규칙이 만들어진 배경의) 일부는 금주운동 때문으로, 당연히 술 소비를 줄이고자 했던 것”이라며 “하지만 이 규칙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진 이유는, 호주 군인들이 프랑스 서부전선에 투입돼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본국에 있는 이들이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반면 ‘6시의 술 한잔’(‘six o’clock swill’)으로 불리던 이 규칙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즉 짧은 시간에 폭음을 하는 습관이 생겨난 것으로, 당시 오후 5시에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곧바로 술집으로 달려가 6시, 문을 닫기 전까지 ‘왕창’ 마시는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급하게 달리다’가 바닥에 토사물을 뿌려놓는가 하면 그 자리에서 소변을 갈기는 이들이 종종 나오곤 했다. 이 때문에 바(bar)는 술 취한 이들의 소변과 구토물을 흡수하도록 하고자 바닥에 톱밥을 까는가 하면 많은 바들은 취객들이 남긴 만취의 흔적, 그 보기 흉한 오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 바닥과 벽을 타일로 장식(일부 펍에는 오늘날까지 이런 벽이 남아 있다)하기도 했다.
미드포드 박사에 따르면 일부 주(State)에서는 ‘six o’clock swill’이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865년에는 음주량을 줄이기 위한 또 하나의 방안으로 ‘박스형 와인 저장고’(Bag-In-Box storage for wine)인 ‘wine cask’(플라스틱 봉투에 와인을 넣고 종이박스로 포장에 판매하는 와인으로, 오늘날 barrel, butt, punchon, pipe, barrique,hogshead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라는 게 발명(?)됐다.
머피씨는 “이 카스크는 와인은 술을 더 빨리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와인을 보관하며 적게 마시게 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병에 담긴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면 즉시 산화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마개를 따고 마시다 남기게 되면 다음날 싱크대에 버릴 수밖에 없기에 한번 마개를 딴 와인은 모두 마셔버리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카스크 와인 저장고는 플라스틱 봉투에 수도꼭지와 같은 장치가 있어 원하는 만큼 따라 마시고 남은 와인을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다. 머피씨는 “카스크 와인 저장고는 와인을 산화되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당국의 의도와 달리 병에 있는 와인보다 많은 양의 와인이 담겨 있는 카스크 와인 상자는 ‘옆구리에 끼고 간편하게 파티에 가져갈 수 있는’ 와인이 되어버렸다.
술과 함께 해 온
초기의 ‘호주 정치’
술과 정치는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함께 해 온, 해로운 혼합물이었다. 초대 에드먼드 바튼 총리가 ‘완전히 술에 취해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가장 터무니 없는’ 예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머피씨는 “1898년 존 노튼(John Norton)이 NSW 보권선거를 통해 식민 정부 의회에 입성했을 때, 그는 ‘매일 잔뜩 술에 취한’ 상태로 의회에 출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로 역겹게 취했다는 뜻”이라며 “약 2개월 후에는 (너무 술에 취해) 의회에서 엉덩이까지 바지를 내리고 카펫 바닥에 오줌을 누었다”고 말했다.
머피씨는 근래의 사례로 1977년, 호주 최대 경마 행사인 ‘멜번 컵’(Melbourne Cup) 대회에서 당시 총독(governor general)이었던 존 커 경(Sir John Robert Kerr)이 술에 취한 채 했던 연설을 언급하며 “이 또한 역겨운 장면”이라고 칭했다. 그해 커 총독은 경마장 관객들 앞에서 “인생은 우리 모두에게 멋진 일입니다”라고 말한 뒤 횡설수설 연설을 이어간 후 우승 기수에게 컵을 전달했다.
1983년부터 91년까지 호주를 이끌었던 밥 호크(Robert James Lee Hawke) 전 총리 또한 술과 관련된 일화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총리로서) 모든 호주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이유의 하나는 ‘1야드 잔’(a yard glass)의 맥주를 한 번에, 빨리 마신 세계 기록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자랑하는 야드 잔은 높이 약 84cm로 2,500ml를 담을 수 있는 크기이다.
그는 1954년 ‘로즈 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1야드 잔에 담긴 맥주를 11초 만에 마셔 그해 기네스북(Guinness Book for World Records)에 기록됐다. 하지만 그는 정치인으로 의회에 입성한 이후 술을 끊었고, 총리 재임시에도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머피씨는 “(호주) 정치인들의 술에 대한 태도가 지난 몇 세대에 걸쳐 호주인의 음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에는 정치권에서는 음주에 대해 많은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National Drug Research Institute’ 강사이자 약물 및 알코올 컨설팅 회사 ‘360 Edge’ 최고경영자인 Nicole Lee 박사는 “(술과 관련해) 의회에서 나온 많은 사례들은 (제한 없이) ‘술 취한 직장 문화’의 또 다른 예”라면서 “의회는 물론 모든 직장은 여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술을 마시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직장 내에서 술 취한 직원과 어울리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술에 취하기…
이것도 문화의 일부?
관련 전문가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진 폭음으로 인해 술은 호주 문화와 밀접하게 얽히게 됐다고 말한다. 미드포드 박사는 “외출을 하면 의도적으로 취하려는 문화가 매우 강하다”면서 “그런 문화가 있다면 폭력과 성적 착취 측면에서 발생하는 피해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늘날 호주인의 음주 습관은 인구통계에 따라 패치워크(patchwork)처럼 나타난다. 니콜 리 박사는 “중년층이 술을 더 마시는 징후가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여성의 많은 음주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또한 도시 거주자보다 지방 시골 지역 사람들의 음주가 더 많다. 리 박사는 “대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음주 수준이 높아지고 위험할 정도의 음주가 늘어난다”고 덧붙였다.
원주민 사이에는 서로 다른 음주 습관이 나타나는데, 일부 그룹은 일반 호주인들에 비해 덜 마시는 편인 반면 다량의 음주를 하는 원주민들에게서는 일반 호주인보다 더 폭음을 하는 경향이 있다.
리 박사는 그 배경의 하나로 “식민지화, 잃어버린 세대(stolen generations) 등에서 비롯된 트라우마가 일부 원주민 그룹의 더 높은 알코올 소비와 관련이 있다”고 진단했다.
호주인 음주량, 감소 추세
이런 가운데 호주인의 음주 행태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술과의 긴밀한(?)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금주를 선언하거나 금주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Dry July’ 운동이 점차 인기를 얻고 있다. 이는 지난 2008년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 ‘Dry July Foundation’이 벌이는 캠페인으로, 암 지원 단체에 기금을 모으기 위해 7월 내내 술을 마시지 말자고 사람들에게 촉구하는 연례 금주 운동이다.
알코올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전반적인 음주율도 감소하고 있다. 이는 특정 인구통계학적 요인 때문으로 풀이된다. 리 박사는 “20대는 여전히 술을 ‘많이’ 마시는 집단이지만 음주 인구는 적은 편”이라며 “술을 마시는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줄어들고 덜 마시며 음주를 시작하는 시기도 늦어지고 있는데, 이는 정말 큰 변화”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 같은 변화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관련 전문가들은 “교육, 인식, 다양한 우선순위가 뒤섞인 때문”으로 보고 있다.
리 박사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더 건강한 신체를 원하고 외모를 의식하는데, 술은 그저 마시기만 해도 살이 찌는 유일한 약물”이라며 “미드포드 박사가 말했듯 지금의 젊은층은 20~30년 전보다 알코올의 영향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