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센트럴 코스트의 창밖은 어둡고 고요하다. 간밤의 흥분이 노루 꼬리만 한 꼬리를 남긴 채 그 속으로 숨어들었다. 시드니의 봄도 사부작거리며 다가오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젯밤은 창밖 새들과 풀벌레까지 유난스레 울어댔다. 미물들까지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축하하는 것 같은 기쁨으로 충만한 밤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시드니 건너 북반구의 밤하늘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북극성을 찾아보기라도 하듯이. 나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열어 깊은 심호흡을 한다. 도그마에 갇혀있던 한국문학과 한국작가들에 대한 애정이 유성처럼 폭발하는 밤이다.
그곳에는 서울을 아니 한반도를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있다. 해방의 공기, 자유의 물결이 남반구 시드니까지 밀려든다. 이제 변방이 아닌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선 한국문학이 자랑스러워 함성을 지르고 싶은 밤이다.
온종일 붕 뜬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어젯밤 역사적 사건인지라 잊으려 하면 할수록 한강 작가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수상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러는 내가 이상했다. 이제 내 일을 하자며 주변 뉴스를 끊을 생각이었다. 주책없이 빠져드는 내가 싫었으나 한강 작가의 역사적인 수상 앞에서는 내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질수록 그녀의 이야기가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참으로 묘한 끌림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고 남편이 한강 수상 축하주를 마시자고 했다. 그 순간 축하연 계획을 묻던 기자에게 답하던 작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한창인데 축하연이나 기자회견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작가의 연민에 나는 반했다. 차분하고 다부진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잔잔한 파장이 밀려와 남편과 나도 와인 잔을 치우고 소박한 식사로 저녁을 끝냈다.
8년 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출판사에서 택시비를 주었지만, “상 받았다고 달라질 게 뭐 있나요?”라며 전철을 타는 게 편하다고 했다. 빨리 집에 가서 쓰던 글을 계속 쓰고 싶다고.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그녀를 보며 역시 대가다운 찐 문학인인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나 보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상 수상 연락을 전해주며 이후에 제일 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작가는 “맨 먼저 아들과 차를 마시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나는 그런 내 취향의 그녀가 좋다. 그녀는 작가인 체 떠들거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녀의 조곤조곤하고 낮은 말투에는 진정성이 넘친다. 그녀는 천직이 겸손한 ‘평생 글쟁이’이다. 어차피 글 쓰는 본인도 그런 별명 하나 얻어올 수 없을까 고민 중이다. 이게 다 기적처럼 다가온 한강의 힘이다.
한국 국회, 그 정쟁의 전쟁터에서도 한강 작가의 수상이 발표될 때는 양당이 잠시 정치싸움을 멈추었다. 1차대전 때 벨기에에서 일어난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것이 문학의 힘, 한강의 힘이었음이 분명했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최고 포커스를 맞추어 작가를 영예스럽게 한 『소년이 온다』를 뽑아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오래전에 꽂아둔 나의 애서가 소중한 한국의 유산이 아니 전 세계적인 유산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군데군데 만년필로 밑줄 긋고 메모해놓은 문장들을 접하니 처음 독서 때의 감회가 꿈틀거린다.
한강 작가는 잔혹한 권력에 맞서서
고통스러운 역사적 사건을 은유와 상징으로
5.18을 정면 돌파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소환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는 주인공 정대를 통해 기억을 불러낸다. 붙들어야 할 기억들, 더 빨리, 끊어지지 않게 기억을 이어가야 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갖 기억을 소환한다/ 여름밤 마당에서 등목을 했지/천변길을 따라 자전거를 탔지/누나가 햇감자를 쪄줬지/혀를 데어가며 그걸 훌훌 먹었지/국화빵 봉지를 스웨터 속 왼쪽 가슴에 품고 누나가 기다리는 집으로 달렸지/키가 자라고 싶었지/언젠가 여자를 안아보고 싶었지/나에게 처음으로 허락될 여자/얼굴을 모르는 그 여자의 심장 언저리에 떨리는 손을 얹고 싶었지.
이처럼 작가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시처럼 아름답게 소환한다. 소년의 유년시절 기억이 너무도 아름다워 독자는 더욱 고통스럽다. 이 작품을 쓰며 눈물을 수십 사발은 흘렸을 작가의 발갛게 부었을 눈을 떠올린다. 밤새 수척해진 그녀의 진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을 마사지해주고 싶은 심정으로 독자는 심하게 오열한다.
손바닥으로 문장을 쓸자 문장들이 살아 부스스 일어난다. 일어난 단어들이 찬찬히 걸어서 가슴에 와 박힌다. 가슴이 너무 아파 좀 쉬어 읽자고 말한다. 자꾸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작가의 천부적인 언어에 나는 이미 종이 되었다. 눈앞이 부예진 채 문장들을 읽어내려간다. 옛날에 읽을 때는 울지 않았는데, 내 MBTI 유형이 이러지 않았는데, 그동안 나이를 먹은 걸까?
작가는 이렇듯 현대 산문의 혁신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70년 태생인 그녀는 동시대의 아픔을 여유와 정체성을 지니고 보다 객관적으로 본다. 그래서 이제 한강은 전 세계적인 트랜드가 되었다. 케이 팝, 드라마, 영화가 이미 케이 컬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니 지금이야말로 한국문학이 끼어들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작가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작업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작가는 다른 직업과 달리 “작가는 가만히 앉아서 잠만 조금 덜 자고 쓰면 되는 직업”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간성과 글이 철저히 일치하는 진정성 어린 작가이다. 그녀의 작고도 여린 몸을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오래도록 말이다.
아, 이제야 알겠다. 그 단어들은 고통스러운 단어였음에도 소설 전체가 고통을 가장한 아름다운 시어였음을. 작가의 맨 처음 데뷔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수록된 ‘서울의 겨울’을 소개한다. 한강 문학의 길이 집요한 ‘시적 언어’이며 지독한 ‘겨울 언어’임을 알게 되는.
서울의 겨울 12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소리,
들려주겠네
한강 작가에게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묻는 한림원의 질문에 본인은 한국문학과 함께 자라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한 마디는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아니 온 한국 사람에게 희망의 돛을 달아준 메시지였다. 한강은 위대했다. 한국의 문학을 먹고 자란 한국이 피운 거목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 작가를 소개하는 모든 영어 기사에 책 제목을 한글 그대로 원문(흰,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등)을 사용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어가 변방어에서 벗어나 세계 중심어로 자리 잡고 있음에 가슴이 벅차다.
백범 김구 선생은 “문화가 열등한 민족이 문화가 우수한 민족을 이겨본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이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고 있으니 또 다른 한강이 한국문단에서 나오기를 기대해봄은 어떨까. 우리 모두의 한강은 오늘도 내일도 도도히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