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청소년 정신건강 전문가, “원치 않는 스포츠 시합이 불안감 조장” 경고
대부분의 호주 초등학교나 하이스쿨에서는 매주 하루를 정해 스포츠 데이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 시간은 각 학교별로 수영 혹은 축구 등 한 종목을 정해 그 스포츠를 익히면서 학생들의 신체활동을 장려하는 시간이다.
또한 학교에서 스포츠 카니발이 열리면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달리기 시합이나 점프 같은 경쟁 이벤트를 실시하기도 하는데, 이런 스포츠 시합이 학생들에게 정신적 고통 또는 굴욕감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주 금요일(9일) ABC 방송은 호주 유명 정신건강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런 경쟁 이벤트를 즐기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시합들이 불안감을 고취시키고, 결국 평생 운동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퍼스의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 정신건강 연구원인 헬렌 스트리트(Helen Street) 박사는 “이런 원치 않는 경쟁을 통해 학생들이 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면서 “학교 측은 스포츠 카니발에 대한 전통적 접근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이들이 원치 않는 경쟁을 하게 될 경우 극심한 불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트리트 박사는 “이런 경쟁은 스포츠에 자신 없는 학생들에게 수치심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며 “이는 학생들이 장래에 어떠한 형태이든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을 없애고, 학교에서 벌이는 행사 경험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개혁 및 청소년 복지에 포커스를 맞춘 민간 연구기관 ‘Positive Schools Initiative’ 설립자인 그녀는 이어 “대부분의 학교들이 등급을 매기는 이벤트를 통해 전체 학생들의 고른 신체적 성장 발달을 추진하지만 이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발달 효과가 전혀 없다”고 지적하면서 “심지어 이러한 스포츠 이벤트들이 학교 성적으로까지 분류된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심한 불안감을 유발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포츠 데이 날이면 유독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며, 이런 아이들을 굳이 학교에 가라고 강요하지 않는 부모들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Non-Sporty’ 학생들을 위한 대안은?
그렇다고 이런 학생들을 위해 스포츠 데이를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스트리트 박사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을 스포츠 경쟁에 참여도록 강요하는 대신, 학교 측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녀에 따르면 스포츠 시합에서의 마케팅(marketing), 마셜링(marshalling), 스코어링(scoring), 케이터링(catering) 등 리더십 역할을 맡도록 하는 새로운 이벤트의 도입이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스트리트 박사는 “학교 스포츠 교사들 가운데 ‘이 종목은 회복력을 길러준다’라든가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 ‘어떤 종목이든 한 번은 해 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면서 “중요한 것은, 스포츠 종목에 자신 없어 하는 학생들로 하여금 공개 시합이나 대회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굳이 내보이도록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학교 스포츠 데이에서의 무분별한 경쟁은 적절하지 않다”며 “스포츠 시합에 자신 없어 하는 학생들이 강제적으로 경기에 임해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이는 큰 정신적 상처와 낙담으로 이어지고, 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운동’에 대한 부정적 마음 실어줄 수도
어린이 및 청소년 신체활동 연구원인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대학교 카렌 마틴(Karen Martin) 박사 또한 학생들 스스로 스포츠 시합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교나 교사, 학부모들은 스포츠 경쟁에이 아이들을 활동적으로 만드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경쟁적 스포츠 이벤트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강요받게 되면 오히려 아이들의 신체활동이 위축되고 불안감을 갖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마틴 박사의 의견이다.
그녀는 이 점에 대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오늘날 청소년들의 불안, 우울, 자살률이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하다”고 못박았다.
이어 마틴 박사는 “그런 이유로 모든 공동체가 아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 어떻게 지원하고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부 호주(WA) 퍼스(Perth)의 가톨릭 재단 학교인 ‘John XXIII College’의 스포츠 이벤트는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될 듯하다. 이 학교의 스포츠 데이는 운동을 잘하는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학교 측은 학생 모두에게 스포츠만이 아닌 ‘카니발 데이’로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하이스쿨 학생들의 육상 경기가 펼쳐지면 12학년 학생들은 각 그룹별로 경기장에 입장해 특별 공연을 펼친다. 연극이나 음악적 재능을 가진 학생들에게 있어 이 시간은 자신들의 재능을 펼쳐 보이는 특별한 시간이 된다.
또한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석의 장식, 응원, 구호 및 학생들이 마련한 각종 참신한 이벤트들에 대해 평점을 매겨 특별 ‘Spirit Award’ 대상 그룹을 선정한다.
육상이 주 종목이라면,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해 볼 마음이 있으면 시합에 참여하도록 권고받는다. 자신이 없으면 안 해도 된다.
이 학교 로버트 헨더슨(Robert Henderson) 교장에 따르면 스포츠 데이의 학생 출석률은 다른 날과 차이가 없다.
그는 “우리는 모든 학생들이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한다”면서 “건강한 것과 트랙을 빨리 달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WA 교육부, ‘스포츠 카니발’
프로그램 구성 권한 부여
서부 호주(WA) 주 교육부는 각 학교의 스포츠 데이 이벤트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날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성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주 교육부 대변인에 따르면 이런 결정은 각 학교에 위임되어 있다.
WA 주 교육부의 학교지원국 켈리 프로퍼존(Kellie Properjohn) 국장은 “우리 주의 각 학교 스포츠 카니발은 체육활동은 물론 이벤트 참여와 팀워크를 장려하며 전체 학생들이 함께 즐기는 좋은 기회”라면서 “각 학교별로 개인 또는 팀 행사 등 다양한 이벤트들을 계획하기 때문에 스포츠에 자신 없어 하는 학생들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녀는 “성장기 학생들의 야외 신체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언급한 뒤 “스포츠 데이를 <카니발>과 같은 긍정적 행사로 진행하도록 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또 다른 종류의 신체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고 덧붙였다.
김지환 객원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