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어 대충 정복기
“왓 두 유 두 포 어 리빙?”(What do you do for a living?)
“아이 엠 어 덴티스트.”(I am a dentist.)
내 기억이 맞는다면 ‘민병철생활영어 1권’ 시츄에이션(Situation) 1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흔 해가 넘도록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문장을 백 번 천 번 넘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 외 ‘잉글리시 600제’, ‘조화유의 미국생활영어’, ‘오성식의 생활영어’ 같은 책으로 회화 공부를 하곤 했다.
중학교 때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영어점수를 100점 가깝게 받았다. 외국에 나가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동기 부여가 있었다. 대학 전공을 영어로 골랐다. 신문방송학과 같은 데 가서 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 태평양 너머로 탈출하고 싶어서 그랬다. 대학 가서는 영어 공부를 거의 못 했다. 한국 문학에 빠져 꼬부랑 글씨를 읽지 않았다.
대학 2학년 때, 실생활 영어를 배운다는 핑계로 외국인 헌팅을 나섰다. 지금은 고인이 된 원종배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사랑방중계’라는 프로에 배낭족이 머무는 숙소가 소개됐다. 그 정보를 듣고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있던 여인숙(inn)을 찾아갔다. 거기서 다짜고짜 외국 남자를 불러냈다.
그때만 해도 서울 시내에 서양 사람이 흔치 않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양키가 내 회화 파트너였다. 한국 문화를 소개해 준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달고 덕수궁으로 남산으로 데리고 다녔다. 때로는 포장마차에서 어묵도 사 주고, 붕어빵 맛도 보여줬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파트너를 몇 번 바꾸다 보니 영어에 자신감이 붙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를 정도의 어설픈 영어 실력이었지만 그때는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참에 돈도 벌 겸 영어 관광안내자가 될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실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군대 가기 전까지 내 꿈은 바다 너머 신세계에 발을 내딛는 일이었다. 여권도 발급받을 수 없었던 암울한 시절, 돈 없이 외국을 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입양아를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에 에스코트해 주면 됐다. 마포 성산동에 있던 홀트아동복지회를 방문해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대기 인원이 너무 많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외국행은 어영부영 됐고 대신 논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88년 11월, 대학 4학년 가을 무렵 첫 직장을 잡았다. 2년 정도 다니다 보니 젊은 놈이 너무 패기 없이 사는 것 같아 모험을 하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세계 일주를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 편집국장에게 야심찬 기획서를 냈다. “세계 일주 한번 하고 싶습니다. 원고를 써서 보낼 테니 월급은 그대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 년간 4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 쉬운 말로 배낭족 일 세대였다.
여행하는 도중에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국 여행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코쟁이나 일본 사람들과 주로 여행을 다녔다. 인도에서는 보름간 런던 보이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도 했다. 한두 달 지나다 보니 입에서 단내가 났다. 한국말은 거의 안 하고 영어만 써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정도이니 내 영어 실력이 경지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쓸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잘난 체 해가며 쏼라쏼라 할 수도 없어 점점 영어와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뉴질랜드 이민을 결심했다. 교보빌딩 19층에 있던 뉴질랜드대사관의 이민심사관이 한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당신처럼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믿든 안 믿든 그때 내 영어 실력은 그랬다.
오클랜드에 이민 짐을 풀었다. 1995년 그때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가 통과의례처럼 영어 공부를 하곤 했다. 이유는 딱 하나, 학생 수당 때문이었다. 나도 그 대열에 끼려고 했는데, 전공이 영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차선으로 고른 일이 AUT의 스크린 프린팅 과정이었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공부 중간중간 시간을 내서 운전면허 통역, 중고등학교 통역, 병원 통역을 해가며 모자란 생활비를 벌충했다. 정식 자격증도 없이 그냥 야매(뒷거래)로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녁에는 두세 시간씩 동네 애들 영어를 도와줬다. 한국 책 읽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영어 환경 속에서 살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하늘이 알고 내가 아는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영어 실력이 도통 늘지 않는 것이었다. 이민 초창기에는 내 영어가 현지인 실력의 30% 정도라고 생각했다. 몇 년 안에 80%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눈치만 빨라져 다른 사람 눈에 걸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삼십 년을 영어권 국가에서 살았는데도 영어가 아직도 두려운 것을 보면 정말로 남의 말 배우기가 쉽지 않다. 영어 대충 정복으로 마무리 지을 것인가, 아니면 영어 완전 정복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갈래길에 있다.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참, 돌파구가 하나 떠오른다. 아무도 몰래 나 홀로 훌쩍 세계 일주를 떠나면 된다. 또다시 영어로 잠꼬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실력은 조금 더 늘지 않을까, 하는 야릇한 기대를 해본다.
혹시라도 나 같은 마음을 갖고 짤스부르크를 헤매고 있는 동양 여자가 있다면 이렇게 대화를 주고 받아야겠다.
시츄에이션 00
그녀: “왓 이즈 유어 잡?”(What is your job?)
나: “아이 엠 리타이어드. 하우 어바웃 츄?”(I am retired. How about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