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自) 그렇게(然) 된 숲
숲속 흙 둔덕 너머로 개미들의 긴 행렬이 이어집니다.
일사불란하게 침묵시위를 벌이는 자들 같습니다.
속세를 떠나 도를 닦는 수도승들 같기도 합니다.
저들 가운데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름조차 나와 같은 놈이 있을 것 같습니다.
60년대의 곤궁과 70년대의 암울, 그리고 80년대의 치열함을
더도 덜도 아니게 나와 똑같이 겪어 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대로 산다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더 잘살아 보겠다며 이민도 덜컥 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상을 끙끙거리며 겨우 버텨가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이런 내 생각이 어떻게 그 개미와 통했나 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우두커니 움직이지 않던 어느 한 놈이 올려다봅니다.
손나팔을 만들어 그를 향해 조그맣게 불러봅니다.
“ㅎㅗㅏㄴㅏㅇㅏㅏㅏㅏ~”
오랫동안 내려다본 개미가 어느새 내가 되듯
저 멀리 내다보면 가만한 나무가 되기도 하고
더 높이 올려보면 홀연히 새도 됩니다.
숲에서 오래 자세히 바라보면 모두는 서로 하나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숲은 하나가 됩니다.
‘숲’이라는 모국어를 들여다보면,
하늘을 가리기도 하고 떠받치고도 있는 나무들이 보입니다.
그 나무들에 걸러져 숨어버린 빛의 그늘도 보입니다.
숲이라고 발음할 땐 늘 입에서 바람이 나옵니다.
그 바람 소리 속에서는 서걱대며 부딪치는 나뭇잎들의 소리도 들립니다.
숲이라는 글자 속에서 소리가 된 바람은 울림이 되고,
그늘이 된 빛은 서늘함이 되어 글자 안에 스밉니다.
숲이라고 말하기만 해도 숲의 소리가 들리고,
숲이라는 글자만 봐도 숲의 모습이 보입니다.
숲이라는 글자의 모국어 안엔 숲의 풍경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숲의 헐거운 공간 사이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붑니다.
오랜 세월 바위와 흙과 모래가 서로 어우러진 채 그대로인 늙은 대륙 위에,
저절로 그렇게 된 숲이 있습니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시작한 타국에서의 삶은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지만, 여전히 낯설고 어색합니다.
사람들도, 또 그들이 사는 모습도 생경하여 그 다름이 아득하지만,
높고 넓은 대륙의 하늘과 땅 그리고 숲의 모습도 다르긴 마찬가지입니다.
애버리진들은 숲을 살리기 위해 숲을 태웠습니다.
높은 나무들이 잎을 다 태우고 기둥만 남을 때 비로소
땅 위 구석구석에 햇빛이 찾아오고 새로운 숲의 생명은 시작됩니다.
타고 남은 재가 거름이 된 흙 위로, 이웃 숲의 씨앗들도 찾아옵니다.
바람을 타고 새들의 배설물과 더불어.
나무 간의 틈새가 헐거워져서 경쟁이 줄어들면
크고 작은 나무와 풀들이 공평하게 어우러지고 벌레와 곤충들도 모여듭니다.
불탄 나무들이 스러져 없어진 그 자리에 다시 건강한 숲이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에겐 어수선해 보여도, 숲의 풍경은 그렇듯 다양하게 부활합니다.
나무는 죽었으나 땅은 죽지 않았고, 그 땅 위에서 타 죽었던 숲은
저절로 그렇게 다시 숲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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