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이제 다 끝났어
이런 식의 선전포고는 제발 살려달라는 고백
말이 아니라 눈을 보고 사람들은 손을 잡지. 슬며시 내 손으로 들어오는 타인의 손. 잡지도 놓지도 않고 있다. 이것이 거절인지 허락인지, 아직 알 수 없다. 새는 날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을 때 태어나지. 잡지도 놓지도 않고 나는 그저 여기에 있다. 이 말이 저항인지 위로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가만히 손을 대고 있으면 따뜻해
아직 살아있어요
여기 무너진 첨탑 아래
벽돌을 치우면 머리가 보일 거야
거기 누구세요?
팔딱팔딱 아기처럼 머리로 숨을 쉬는 독백. 태어나려는 거니 사라지려는 거니. 너는 그냥 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새를 잡아야 할까 놓아줘야 할까 고민해 보렴. 슬며시 손에 힘을 풀면, 공중으로 날아가는 무언가 있다. 빛이 떠나간 자리는 눈의 아픔일까 슬픔일까 고민해 보렴.
아픔은 이름을 알면 극복할 수 있어요
근데요 선생님, 이름을 알고 나면 본격적으로 더 아파지던데요
계속
살아 있어요
이름을 알아서 차마 버리지 못하는
내가 아는 아픔과 내가 알게 될 슬픔아,
인사하고 만났으니 잘 부탁해
이제 다 끝났어
이런 식의 고백은 다시 시작하려는 노래
잠깐 잠이 들어 손이 새로 변하고 새가 빛으로 변하는 꿈을 꿨지. 폐허가 된 대성당에 들어가니 레이스 칼라를 단 옷을 입은 소년들이 노래하고 있다. 날개를 단 세계가 구멍 난 지붕으로 빠져나가고 나는 그게 너무나 행복해서 메아리처럼 지켜본다. 이 꿈이 끝인지 시작인지, 아직 알 수 없다.
시작노트
처음 시가 나에게 찾아왔을 때, 나 스스로 모토처럼 간직했던 말이 있다. ‘시(詩) 속의 공간과 공간 속의 시(詩)를 쓰고 싶다.’
건축과 시는 결국 같은 것이다. 둘 다 이 세계를 번역하는 언어이다. ‘개인(주체)’이
‘세계(객체)’와 관계 맺는 방식이자, 그 과정을 관찰하고, 구축하고, 다시 무너뜨리는 일이다. 하나는 마이크로한 렌즈로 세계를 보고, 다른 하나는 매크로한 렌즈로 본다. 하나는 부수기 위하여 짓고, 다른 하나는 짓기 위하여 부순다. 그리고 빈 자리에 질문을 하나, 벽돌을 하나, 툭-놓는다. 둘 다 시간의 너머를 보고, ‘지금’ 생성되는 ‘여기’를 지나간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의식 바깥에 배경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재이거나 선험적 조건으로 부여되는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인식 주체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를 스스로 드러낼 때(현현(顯現, Epiphany) 발생한다. 이러한 상대적 시공간론(Space-time continuum)은 공간을 말하는 두 다른 단어로 살펴볼 수 있다. ‘Space’와 ‘Place’. Space가 뉴턴 물리학적인 공간 –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면, Place는 관계를 통해 인식되고, 생성되고, 주체가 거주 하는 장소 – 즉, 카이로스의 시간을 품은 장소이다.
시는 Space가 Place로 변하는 이 지점(장소화, Placemaking)에서 발생한다.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되는 것처럼, 어떠한 공간이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로 호명될 때, 그곳은 시가 되어 피어오른다. 동시에 시는 드디어 하나의 공간(장소)이 되어 날아오른다. 이러한 Placemaking을 다르게 말하자면 스토리 텔링(Storytelling)이다. 시인으로, 건축가로서 내가 할 일은 그저 느리고 고요한 땅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저 멀리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그 위에 잘 올라타는 것. 공간에 스민 시를 휘파람 불듯 가늘게 호명해 잠깐 이 자리에 앉혔다가, 다시 날리는 일뿐이다.
‘세계의 끝’이라는 시는 예전에 방문했던 베를린의 빌헬름 카이저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가 모티프가 되어 건진 시다. 2차 세계대전 중 이 교회의 대부분이 폭격으로 파괴되고 첨탑, 현관 일부만 남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상흔을 처참히 드러내는 이 유적을 허물지 않기로 했다. 무너진 첨탑을 그대로 두고 대신 그 주위를 둘러싸며 4개의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상기시키는 과거의 공간, 그리고 그 옆에 수만의 푸른 빛 (신관은 21,29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박은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졌다.)을 품고 위로하는 미래의 공간, 그 사이에 나는 서 있다. 사라짐과 드러남 사이 놓인 이 텅 빈 곳으로 현재의 새가 날아든다. 무너지면서 시작하는 무언가를 향해 날아든 새. 그곳을 나는 잠깐 손에 잡았다. 그의 새까만 눈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창공에 날렸다.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