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즈만 판타지아
사진으론 그 느낌이 안 나온다. 수평선까지 무릎에도 안찰 정도의 얕은 바다를 바라보며 선 자세로 실례를 했다.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로 기억될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잠시 하나가 되었다. 일보다가 지구로부터 사라지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순간 지상 최고의 부자가 된 느낌이었었지만 문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차 속에서 폰 스크린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느리게 몸을 돌렸다. 한 천 년 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바다에서 피쿼드 포경선 갑판 위 구멍에 목발을 심은 에이합 선장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차들이 전 속력으로 질주하는 도로로 나왔다.
바다 반대 편 쪽에는 전혀 다른 낯선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형지 포트 아서에서 탈옥한 사내를 길에서 만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풍경. 그 곳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 순서가 의미가 없었다. 도체 의미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습관을 갖고 있는가? 나에게는 살아서 생동하는 유일한 의미란 내 몸 속에 부글거리는 육체의 욕망, 그것이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리비도라 불리는 욕망 그 자체뿐이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기도 했다. 리비도의 외피를 떠나서 사랑이 성립할 수 있을까? 또한 사랑의 질이란 시간의 길이로도 측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하루 밤을 함께 보내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리장성이란 무구한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심지어 이름을 모른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름이란 대체 무엇인가? 약간은 갸름한 얼굴의 윤곽과 얼굴의 윤곽만큼 가냘픈 목소리 그리고 아무런 저항없이 내 몸을 받아 주었던 가녀린 몸의 일부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름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없다. 몸과 몸이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모텔에서 만난 그 소녀. 나는 한 번도 그네를 더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민자의 삶이란 구천을 떠도는 유령과 같은 삶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얼굴을 한국 하늘 아래 두고 온 그래서 이민의 시간 동안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그 얼굴을 방치한 죄를 짓고 있는 그래서 그런 죄책감을 안고 이 곳 타즈마니아 까지 왔다. 그럼에도 나는 에이헙 선장을 이스마엘과 핍에게 맡기고 잠시 후면 이 섬을 떠나야 한다. 마치 그것은 그후 그녀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과정이 오디세우스의 귀향하는 항로이겠지만 아니면 환자의 일종의 치유의 과정이겠지만 난감한 것은 언제 어떤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상처없이 상처입은 자. 그래서 한 번도 자신을 정면으로 대면해 볼 기회가 없었던 그래서 자신이 상처입은 동물이라는 사실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채 담담하게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탕자처럼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도망가는 자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달아나는 여정은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우회로이긴 하지만 우린 그 길이 얼마나 긴 길이 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눈먼 자, 귀머거리, 문둥병과 같은 다른 방식의 유형이었다. 울타리가 너무 넓어서 마치 울타리의 부재만 느껴지는… 그래서 자유세계에서 산다고 생각하며 가두리 속에 갇혀있는 남해 어느 연안의 은빛고기들처럼. 우리들의 자유란 고작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는 포트 아서에서 각기 다른 명찰을 죄수복에 수로 새긴 수많은 다른 나를 만나 보았다. 그 중 하나는 런던에서 남자를 애인으로 두었다는 죄로 포트 아서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제이슨도 있었다. 헌데 제이슨뿐일까? 그곳에는 부쓰 소장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엘리자벳과 아이들과 하녀들까지 모두 유형지의 죄수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구원은 걷는 데 있다. 되도록 에이헙처럼 멀리까지 걷는 것이다. 흰고래를 잡는다는 명목상의 가상의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그 도보 여행은 여행일정표도 네비도 없는 걷기이다. 길을 걷다 보면 생각에 잠기게 되고 생각하고 메모하게 되고 운이 좋으면 허름한 모텔방에 두고 온 그네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맹수와 같은 사랑으로 내 몸은 그녀 속에서 부르르 떨게 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나는 부드러워 질 것이다. 이름 없는 비치에 두고 온 저 희미한 수평선처럼.
차에 돌아온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엑셀을 힘껏 밞았다. 곧 차는 시속 110킬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정을 숨가쁘게 소화한 우리들은 호텔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일 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우리들은 마치 어른에게 야단맞은 아이들처럼 차 안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리는 차량 앞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도로 양 쪽으로 산불에 그을린 둥치만 남은 나무 가지들이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가운데가 잘려 나간 거대한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처럼 도열한 채 차량 뒤로 마구 흘러갔다. 그리고 도로의 갓길에 수없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로드킬! 죽음의 사육제!
타이어에 밟히고 부서지며 도살된 웜뱃, 왈라비, 캥거루의 시신들. 공짜 점심을 먹으러 잠시 차가 지나가지 않는 틈을 타서 주검 위로 배회하는 굶주린 검은 새들. 먹고 산다는 일의 비애를 저들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도 드물 것 같다. 도로 위로 달리는 차량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나의 하얀색 SUV도 예외는 아니다. 도로 상에서의 운전자끼리의 약속은 야생 동물에겐 죽음일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은 없다
곧 캄캄한 밤이 도로 주변을 삼켰다. 헤드라이트 불빛 만을 의존하며 달려야 하는 나는 운전대를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차는 맹목적인 증오를 품은 채 미친 듯이 타즈만 하이웨이를 달렸다. 이미 너무 많은 로드킬을 목격한 나는 또 하나의 로드킬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헤드라이트 빛을 반사하며 길에 누워있는 캥거루들의 흩어진 유해들의 과잉은 운전자의 동정심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현실이라는 시간대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파멸 속으로 뛰어든 것은 운전자의 잘못이 아니지 그건 저들의 운명일 뿐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이제 막 타즈만 바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달은 헤드라이트 빛 꼬리를 앞에 달고 언덕 너머 저 편에서 곧 나타나게 될 호바트의 불빛을 향해 달팽이처럼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는 개미만한 SUV 한 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 어느 곳에선가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태풍의 눈 한 가운데에는 지상에서 한 번도 피어 본 적이 없는 천만 개의 꽃잎을 갖고 있는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