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냄새를 캐다
초겨울의 캠시에 그녀가 있다. 비미쉬 스트리트엔 낙엽이 오들오들 떨며 몰려다니고
아스팔트 길에선 그녀의 체취가 올라왔다. 하숙생 시절, 태엽 풀린 주말이면 고향의 석양같이 목이 메어왔다.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야만 도착할 수 있었던 한인촌 캠시.
안간힘을 쓰며 외국어 간판 사이를 비집고 서 있던 한글 간판. 길거리에서 들리는 한국어에 토끼처럼 두리번거렸지. 케밥 집과 북경반점 옆 녹슨 양철 대문 해장국집.
가난한 유학생 손에 들려있던 깃이 해진 한 장짜리 메뉴판. 돼지국밥을 가져온 둔탁한 손에선 고향의 파 마늘 냄새가 났다. 뚝배기에선 걱정 가득한 엄마의 근심이 끓고, 뜯어진 잠바 소매에선 가난함이 울먹이고 있었지. 주방 너머에서 곁눈질하던 따뜻한 손이 밥 한 공기를 더 가져왔다. 깍두기 그릇도 채워지고 젓가락도 가지런히 놓였다. 10불짜리 지폐를 내고 고향의 노을과 저녁연기 냄새를 거슬러 받았지. 그녀는 언제든지 쩡하고 현재가 될 수 있어. 그때 국밥 냄새도 나를 한달음에 고향 어귀로 데려가곤 했어. 캠시 시계탑 광장에 그녀가 가득하다.
시작 노트
캠시에 갔다. 아내를 위해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캠시 스트리트는 을씨년스러웠다. 겨울바람이 길거리 플라타너스 낙엽을 몰고 다녔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산문집 하나를 가져왔다. 시의 영감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피라미 튀듯 여기저기서 생각들이 튀어 올라왔다. 튀어 올라온 생각들을 재빨리 연필로 낚아챈다. 생각의 낚시질을 하다 보니 시간이 햇살을 멀리 밀어냈다. 캠시 중심가인 비미쉬 스트리트로 나섰다. 면도날 같은 바람이 껴입은 잠바를 비집고 들어왔다.
마스크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비미쉬 스트리트를 붕어처럼 헤엄치고 있다. 기차역 맞은편 동해 스시집이 보인다. 코너에 위치한 작은 스시 집. 한인 호주 정착 초창기부터 있었으니 나이는 스시집 지붕보다 훨씬 높을 것 같다. 월남 국숫집을 찾아 비미쉬 스트리트를 걸어 올라간다. 캠시 시계탑, 중국 음식을 파는 각종 가게를 지나 찾아간 월남 국숫집, 허무하게 잡화를 파는 가게로 바뀌어 있다. 그 앞에서 망연자실 한참 서 있었다.
쇼핑센터 푸드 코트, 멀리서 보아도 한국 사람이 하는 것 같은 일식집이 보인다. 제육볶음 도시락과 미소 수프를 벽과 마주한 철제 의자에 놓는다. 겨울처럼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 직원의 돈 계산이 끝나길 기다리며 커피숍 앞에 서 있다. 일하던 동료가 손님이 왔다고 언질을 하자 계산하던 손을 멈춘 아가씨 멋쩍은 듯 얼굴을 들어 인사를 한다. 롱 블랙, 커피집에서 처음으로 시켜보는 아메리카노다. 보리차 같은 커피를 기대했는데 작은 종이컵에 든 커피는 쓸개처럼 맹렬히 썼다. 캠시의 쓸쓸함이 롱 블랙을 더욱 쓰게 만든 것 같다.
캠시는 고향 같은 곳이다. 초창기 시드니 동부 쿠지에 살았던 나는 한국 사람이 보고 싶으면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캠시에 오곤 했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만날 것 같은 설렘으로 비미쉬 스트리트를 수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지금은 한글 간판이 있던 자리에는 중국 간판이 들어서 있다. 길에서는 더 이상 한국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사 떠난 빈집 같은 거리에 칼바람이 거세다. 그 거리에 푸르렀던 젊은 날의 추억이 그녀가 되어 설탕 같은 두근거림으로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