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와 미역국
며느리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이번엔 사부인대신 내 손으로 산관을 하리라 마음을 먹고 여장을 꾸려 아들네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여행을 할 때마다 좁은 기내에서 장시간 버텨내는 건 여전히 내게는 고역이다. 통로 석을 요청하여 자리를 잡고 자주 일어나 맨 뒤로 가서 스트레치를 하거나 걷기도 하며 산관하는데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오 년 전 꼼짝 않고 앉아만 갔다가 건강을 해쳐 고생한 적이 있어서 이번 장거리 비행에 염려가 은근히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내에서 저녁메뉴로 한식을 주문했더니 더운물만 부으면 되는 인스턴트 미역국이 나왔다. 미역국이라는 흉내만 낸 국을 먹으며 며느리에게 국을 끓여주러 가는 시어미로서 비행기 안의 미역국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분만과 미역국에 얽힌 나의 사연이 생각나기도 했고 친정엄마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나는 동경에서 살았는데, 1980년에 적십자 병원에서 한 밤중에 첫 아이를 낳았다. 이튿날 아침 커튼을 친 옆 침대에서 구수한 미역국 냄새가 내 쪽으로 솔솔 스며들어와 나의 침샘과 눈물샘을 자극해오는 게 아닌가. 옆 사람들이 조총련계인 것을 알고는 말도 섞지 못하고 말았지만, 나는 병원에서 나온 밋밋한 아침밥을 눈물과 함께 삼켜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을 출산하고, 커다란 국그릇을 가득 채운 미역국을 특별한 음식이라도 하사 받은 듯 맛있게 다 비우셨다. 당시 어린 생각에도 나는 이담에 시집가서 아기를 낳으면 엄마처럼 큰 사발에 미역국을 먹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었다. 외할머니가 딸을 위해 끓여내 오신 그 구수하고 고소한 참기름냄새가 온 방을 풍기던 그 미역국이 이국 땅 낯선 침대에서 낯선 음식을 떠먹으며 그날따라 어찌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장녀인 내가 두 아이를 낳을 때마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해서 엄마는 내게 올 수가 없었다. 엄마는 얼마나 이 딸이 안쓰러웠을까. 엄마는 얼마나 딸이 낳은 첫 손주를 보려고 한달음에 달려오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내 마음을 파고든다. 당신 대신 여고를 갓 졸업한 동생에게 미역국 만드는 법을 가르쳐서 비행기에 태워 나에게 보내고,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이다. 동생은 내가 해산한지 이틀 만에 부랴부랴 미역국을 들고 와서는 ‘언니’하며 민망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내밀었다. 형부가 사다 준 쇠고기로 국물을 내서 끊였는데 너무 짜서 다시 만들었더니 미역만 둥둥 떠있는 멀덕국이 되었단다. 그 당시의 미역은 지금 같지 않았다. 엄마가 미역을 일곱 번 박박 씻으라 했건만 두 번 씻고 깨끗해서 그냥 끓였더니 짜서 버리기를 여러 번 했다고. 어찌할 것인가. 그래도 나는 동생이 갸륵하기만 했다. 나는 지금도 동생이 당황해 하며 만들었을 그 맹탕이 된 국에 동기간의 정이 담겨 있었기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미소 짓는다.
아들은 출근을 하고 배가 남산만한 며느리가 6살 미만의 올망졸망한 세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에 나와 나를 반겼다. 아들네 집에 들어서면서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일부터 맡았다. 내가 도착하고 며칠 안 되어 예정일보다 빠르게 진통이 와서 병원으로 간 며느리가 단 90분만에 순산을 하고 다음 날 퇴원하여 집으로 왔다. 점점 고령화 시대가 되어가는 판에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낳지 않겠다는 젊은 부부가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우리 며느리는 넷이나 낳았으니 참 대견하고 예뻐 보였다. 제 형제들을 쏙 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난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아기를 내 품에 안으니 너무나 좋아서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할머니인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들네 여섯 식구를 위하여 내 일손이 더 바빠졌지만 마음은 마냥 행복했다.
그 옛날 외할머니가 내 어머니에게 끊여주었던 그런 미역국을 나는 며느리에게는 해줄 수가 없는 게 안타까웠다. 며느리는 임신초기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 요오드 성분이 많은 미역국을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기로 진하게 국물을 내어 배추 된장국을 푹 끊여 큰 사발에 담아 미역국을 대신했다. 며느리는 고마워하며 맛있게 잘 먹어 주었다. 멸치국물에 무국, 시금치국, 콩나물국도 끊여댔다. 나는 자신 없는 음식은 요즘식대로 인터넷에서 찾아가며 만들었다. 내가 해 주는 음식을 식구들이 모두 맛있게 잘 먹으니, 아무래도 내 음식 만드는 솜씨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엄마는 60년대 초 요리연구가인 왕준연 요리학원을 다녔다. 요즘처럼 프린터가 없던 시절이어서 손수 음식 만드는 법을 적은, 간장과 기름으로 얼룩진 공책을 지금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금 살아 있다면 카톡으로 음식에 관한 정보도 배우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련만… 일찍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도 못하고 누워계시다가 세상을 떠서 못내 아쉽고 한이 된다. 엄마는 첫 손주인 내 아들의 돌상을 한국에서 차려주었다. 그 첫 손주가 이제 믿음직한 어른이 되었고, 좋은 아내를 맞아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봤더라면,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댄다.
내 동생들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씨며, 일하는 모습이, 엄마를 닮았다며 신기해 한다. 내 자신도 일상에서 문득 내 안에 엄마를 발견할 때가 있어 놀라곤 한다. 엄마가 지금 내 곁에 와 있는 건 아닐까.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 들려 가족 묘에 있는 엄마에게 며느리 산관 잘하고 오겠다고 인사를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엄마의 영혼도 나를 따라 이곳에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드니 집으로 돌아온 후 산모용 미역을 사다가 엄마의 미역국을 끓이며 문득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산모가 미역국을 먹게 되었나 궁금해졌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고려시대에 고래가 새끼를 낳은 후 미역을 뜯어먹고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흰쌀밥과 미역국을 먼저 삼신에게 바치고 나서 산모가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근자에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산후조리원의 식단을 보니 하루 세끼 일주일 내내 미역국이 나온다. 그러나 의학정보에 의하면 모든 산모에게 다 좋지는 않다는데…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요즘 세태에 우리의 산모와 미역국의 풍습이 과연 얼마나 먼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게 될까. 그들은 먼 조상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산모 곁에서 전설처럼 들려줄지도 모른다.
권영규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