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길목에서
올해도 울긋불긋하게 물든 단풍나무 잎과 낙엽들이 집 앞뜰을 덮어 도로가까지 붉게 물들여 놓아 계절의 흐름을 알려준다. 어느새 소슬바람에 가을 잎새들이 몸부림친다. ‘누가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 세월이 너무 빨라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면 아쉬운 미련만 남고 앞을 바라보면 길지 않은 인생에 안타까움만 가득한 것 같다. 붉게 물든 단풍잎과 함께 가을의 정취에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다가 친구 파트너와 일거리가 있어 모처럼 공사를 맡아 일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계약자가 일을 다 마치지 못한, 기술적으로 어렵고 힘든 잔여 공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고 예전 어느 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재 및 공구 준비를 하고 아내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챙겨 현장으로 향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겸하는 브라운 칼라의 일터이다.
일을 하다보면 힘들지 않는 것은 없지만 댓가를 받아 경제적 여유도 생기니 즐겁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몇 년 동안 쉬다가 하는 일이라 땀 흘리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서는 될 일인가. 때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계약을 했으면 약속의 의무 사항이고 마땅히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일한 대가로 생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그래서 호주머니가 두둑할 때는 여유가 생겨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적자가 될 때는 마음이 조급해 지기도 한다. ‘노동 없이는 인간의 마음과 뇌는 행복해지지 않는다.’ 라고 리처드 던퀸(영국)은 말했다. 노동에 대하여 물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로 우리가 좀 더 나은 삶과 행복을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나는 어린 시절 한 때 부모가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도시로 떠나고 친할아버지와 누나, 세 식구가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일곱 살 초등학교 1학년 때 소를 먹이고 풀을 뜯어 망태에 넣어 나르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그 일을 마치고 해질녘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하루는 소 풀 먹이기가 싫증이 나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친구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교문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더니 등 굽은 나의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나는 깜짝 놀라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십리 길이나 되는 집으로 가서 소를 끌고 소 먹이러 나갔다. 다행히 야단을 치지 않는 것이 어린 손자라 아마 측은했기에 그랬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무척 소가 미웠다. ‘너 때문에 매일 풀을 먹이려 들판이나 산으로 가야되고 풀을 뜯어야 하니.’ 미운 마음에 고삐로 소 엉덩이를 내리 쳤더니 소가 놀라 뒷발질로 나의 급소를 차서 나는 땅을 데굴데굴 굴러서 한참동안 정신을 잃었다. 아무도 없는 들판에 소는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고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다. 동물들도 학대를 하면 화가 날줄을 왜 몰랐던가. ‘서울에서 매 맞고 시골에서 주먹질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소가 밭갈이를 할 때는 소의 노고를 새삼 깨달았다.
청년 시절에 직장 따라 국내외, 사막 지대까지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노년에 이르러 시간의 여유에 따라 가끔 알바와 같은 일을 친구와 같이 하면서 서로의 의견과 방법 차이로 충돌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화와 타협을 하기도 하며 마치 물이 높은 폭포에서 줄기차게 떨어진 폭포수 같이 움직임의 극치를 이루기도 한다. 계곡의 물소리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소리내며 움직여야 생기 있는 물이 되듯이 건설 현장의 망치 소리도 이와 같으리라. 일도 스스로 원하고 즐겁고 활기차게 할 수 있는 일이면 유쾌하다. 적성에 맞으면 더 좋고 일하는 댓가가 더 많으면 더욱 좋다. 쉬다가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면 자신감과 호기심을 갖게 되고 감사한 마음이 들며, 주문이 오면 기쁘다. 아직도 할 일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바쁘게 살면 아픈 것도 다른 잡념도 잊어버려 건강도 좋아진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듯이.
많은 건설 일을 하면서 나의 삶도 이곳저곳 산천 따라 세월 따라 물길 따라 유유히 흘려간다. 물은 흐름에 따라 소리와 빛과 움직임이 달라진다. 상류에서는 빠르게 흐르고 맴돌다가 돌이나 바위에 부딪치며 때로는 공해에 시달리다가 하류로 강이나 바다로 흐른다. 잠시 현장 뒷뜰 골짜기의 흐르는 물과 단풍을 바라보면 거울에 어리듯 비치는 단풍잎들이 물들어 더욱 더 화려하다. 풍성한 결실의 계절에 단풍은 아름다운 가을 자연의 섭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보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잎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소슬한 바람에 낙엽이 지는 이 뜰에서 다가오는 계절은 싱그러운 새싹과 초록색으로 돋아나기 위해 오늘도 성실히 일하는 자화상을 그려본다.
양상수 / 호주문학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