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갑자기 집안이 물구덩이 속처럼 답답하다. 아니 어쩌면 이끼가 잔뜩 낀 돌멩이처럼 집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나 자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열쇠를 집어 들고 뛰쳐나와 들숨날숨을 크게 쉬고 차의 시동을 건다.
‘어디로 갈까?’
목적이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연해진다. 근처의 시원한 바닷가나 공원으로 가볼까 망설이는 동안 차는 습관처럼 혼스비 쇼핑센터로 향하고 있다. 늘 제한된 시간에 바쁘게 다녀가던 평상시와 다르게 자유로운 시선에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여유롭게 여기저기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다리도 쉴 겸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시킨다. 이 세상에 커피의 종류는 이것 한 가지 뿐인 양 항상 똑같은 주문이다. 새로 알아야만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이민생활 속에 아는 것만 열심히 활용하는 습성 때문이다. 커피 위에 그려진 하트만 무심히 바라보다 눈을 돌려 창밖을 보니 분수대가 내려다보인다. 높은 건물들 속에 포위되어 진뚝 주눅이 든 듯 힘겹게 올린 물이 휘청이며 쏟아지고 있다. 어긋난 물의 방향은 어수선하게 뿌려지고 군데군데 낀 녹과 이끼는 검버섯처럼 퍼져있다.
‘어느새 저렇게 변했을까?’
이십오 년 전 영어학교 등록을 하기 위에 혼스비를 방문했을 때 이 분수대를 처음 만났다. 특이하고 웅장한 청동조각의 분수대가 교외의 조용한 마을 광장에 있어서 놀랐었다. 제일 위 나뭇가지에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앉아 내려다보고 있고. 날개모양의 투명물통에서 두 줄기 물이 흘러내렸다. 그 아래 돌고래상 밑에 있는 더 큰 물받이에서는 폭포처럼 물이 양쪽으로 쏟아진다. 그 물이 물레방아처럼 커다란 시계톱니바퀴를 돌렸고 가운데 가장 큰 원형시계가 움직였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신과 남신의 얼굴이 원통 위에 달려있고 물이 머리를 가득 채우면 교대로 머리를 숙여 힘차게 물을 쏟아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철커덩 쏴, 철커덩 쏴 하며 장군의 호령 소리로 광장을 울렸고 쏟아내며 뿌려진 물은 시원하게 흘러 넘쳤다. 분수대는 마땅히 혼스비 광장의 주인공이었다. 그 시절 분수대를 바라보며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찬 나의 심장은 얼마나 힘차게 뛰고 있었던가. 끝없이 물을 받아내고 쏟아내는 일이 반복되어 낡아버린 분수대처럼 급급했던 내 이민생활은 쉴새없이 다가오는 어설프고 낯선 하루하루들로 몇 십 년이 흘러버렸다. 약해진 심장소리와 낡은 허물만 남긴 채… 옛 모습을 회상하니 지금의 모습이 더 처연하고 공허하다. 인간이야 늙어도 어쩔 수 없지만 분수대는 보수해가며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왜 방치하는 것일까. 어쩌면 조각가가 그대로 두기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피조물은 시간의 톱니바퀴아래 흘러가고 낡고 소멸해간다는 의미로. 아기와 함께 온 젊은 부부가 분수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분수대의 옛 모습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라 생각하겠지. 어린 손녀가 나를 보며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의 모습이라 생각하듯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변해도 광장의 그 자리를 지키며 버티고 있는 낡은 분수대가 정겹게 보일 때쯤 카페를 떠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 찬거리와 꽃 한 다발을 샀다. 연꽃이 피어나듯 아이들이 자랐고 때로는 수초 가득한 물웅덩이 같지만 이십오 년을 한결 같이 나를 품어주는 낡은 집이 고마워서.
이영덕 /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