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해녀를 만나다
폭염이 예상되는 한여름에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애초에 계획한 건 아니었다. 이곳 시드니에서 학교선생으로 일하는 딸이 한국문화원에 들렸던 게 계기가 되었다. 딸은 그 날 문화원 도서실에서 해녀사진이 표지에 나온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기면서부터 해녀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들었단다. 같은 여자이면서 겁도 없이 그 검푸른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여 깊게는 20미터까지 내려가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들을 채취한다는 얘기며, 아무런 산소장치 없이 일이분 동안 무호흡으로 작업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더구나 딸은 제주도에 가서 직접 해녀를 만나보고 학생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직업의식이 발동했던 모양이다. 원래 계획했던 해외여행에 제주도를 추가하고 엄마도 가자는 바람에 나는 부랴부랴 짐을 꾸려 같이 나서게 되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 코로 스며드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섬 냄새라고 할까, 퍽이나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겨주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이튿날 먼저 렌터카로 제주해안을 한 바퀴 돌다가 해녀할망(할머니)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무언가 손질을 하고 있는 곳에 차를 멈췄다. 아침에 자맥질하여 따온 성게를 갈라서 작은 숟가락으로 파내어 유리병에 담고 있는 손놀림이 빠르고 능숙하다. 딸기잼 병 크기의 용기를 성게 알로 조금씩 채워가는데 껍질이 수북이 쌓인다. 옆의 바위에 널려 있는 잠수복은 뙤약볕에 벌써 말라 있다. 오래 입어 바다 속에서 낡아진 고무옷이다. 성게 한 병 사기로 하고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한 사람은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구십 가까이 된다고 옆의 할망이 알려준다. 오래 전엔 지금처럼 귀를 가린 고무모자 대신 광목천으로 만든 물수건을 사용하고 깊은 바다에 들어갔으니 청력을 잃고 만 것이리라.
해녀의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여자들이 바다에서 물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원래 남자가 물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가 일하면 세금을 내야 했기에 생활이 되지 않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여자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여자가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들어 일하는 것을 금하라는 명이 내렸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물질 일을 계속 이어 갔다.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바다에 나가 헤엄을 배우고 자맥질 기술을 익혔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도 강인한 생활력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게 되었다. 이쯤에 이르자 남편들은 요즘 말하는 ‘하우스 허즈번드’가 되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맡았다. 그러나 갓난아기가 배고파 울면 아내가 바다에서 나올 때까지 아기를 방치할 수밖에 없던 모진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해녀 박물관에는 직접 해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동영상이 꽤 있었다. 예전엔 배고팠던 것보다 천대 시 당하는 게 더 싫었는데 지금은 떳떳하고 보람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표현으로, 바다는 나에게 입출금전표가 필요 없는 은행, 노력한 만큼 주는 바다는 정확하다, 한없이 깊고 넓은 만큼 한없이 좋은 바다라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더욱 깜짝 놀란 사실은 만삭의 몸으로 바다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와서 2시간 후 출산을 했다는 이야기며, 아기를 낳고 3일 만에 다시 바다로 나갔다는 이야기에는 입이 다물어 지질 않았다. 소라가 많이 나오는 때에는 찬 겨울 바닷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생활은 물론 집도 사고, 땅도 사고, 자녀들을 육지에 보내 공부도 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딸들에게 고된 해녀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강인함을 넘어 경이적인 그 억척스러움은 대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해녀들의 굵게 패인 주름진 얼굴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그 숱한 인고의 세월을 바다 속에서 보낸 그들에게 바다는 또한 엄마이기도 했단다. 힘든 일을 겪을 땐 엄마 같은 바다에 나가 울었으니까.
박물관에서는 공연을 하는 날도 있었다. 제주방언으로 해녀노래를 부르며 해산물 캐는 광경을 보여 주기도 하고 멸치 후리는 노래에 맞추어 그물망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 대는 장면은 관람객을 불러내어 함께 했다. 딸에게 등을 떠밀려 나도 한 몫을 했는데 그물에 걸린 멸치들이 사탕으로 둔갑해 있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장 우리의 관심을 모은 건 해녀체험을 하고 노래까지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장답습을 하느라 폭염 속을 뚫고 우리는 강행군을 했다. 딸이 해녀할머니와 단둘이 한 시간 가량 물질 하는 것을 배우는 동안 나는 멀리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땡볕에 계속 서있기 힘들어졌을 때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려고 돌바닥에 맨발을 디뎠다가 기겁을 했다. 불볕에 달구어진 돌바닥은 마치 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 뚜껑같이 뜨거웠다. 그래도 딸이 멀리서 직접 캔 성게를 높이 들어 보여줬을 땐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 공연에서 노래를 선창하던 분을 찾아가 장구 치며 해녀노래도 배웠다. 딸의 취지를 듣고 노래를 가르쳐주마 하고 쾌히 승낙해준 고마운 명창도 예전엔 해녀였다고 한다.
2016년에 제주해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지금은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해녀의 평균 연령이 70세가 넘고 그 숫자는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해녀양성과 해녀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제주도의 커다란 과제이기도 하다.
시드니로 돌아온 딸이 제주해녀 이야기를 앞으로 학생들 앞에 어떻게 구상하고 연출을 할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권영규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