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웃 사촌들
해마다 호주의 날 경축일이 오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길가에 모여 아침식사를 같이한다. 마흔여 채의 집이 들어서 있는 동네에서 한집이 도맡아 매년 우편함에 초대쪽지를 넣어 준다. 이런 이웃 덕분에 동네의 전통이 30년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도 경축일이 다가올 즈음 영락없이 그 집 부부의 이름으로 쪽지가 날아들었다. 맬컴이라 부르는 남편은 우리동네 터줏대감으로 은퇴한 초등학교 교장이다. 쪽지에는 개와 고양이, 포섬*도 환영한다고 적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애완동물은 물론 낮에는 남의 집 지붕 밑에서 자다가 밤이면 슬슬 기어 나와 동네 텃밭의 채소나 과일나무에 열린 과일로 배를 채우는 큰 다람쥐 같은 포섬까지 초대한다는 익살스런 발상이기도 하다. 십 년 전만해도 씩씩한 청소년이었던 그 집의 세 아들과 고명딸 노릇을 하는 큰 개 죠디까지 온 식구의 이름이 초대쪽지에 올려져 있었다. 그 집 앞은 늘 누군가 들락거리며 활기차 보였는데 몇 달 전 죠디를 힘들게 안락사 시키고 지금은 부부만 텅 빈 둥지를 지키고 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빈 집처럼 적막감마저 든다. 매년 아침식사에 참석하는 동안 강산이 두 번 이상은 변했을 세월이 지났고 어느새 내가 시니어 대열에 성큼 들어와 있다. 그렇다고 지나가 버린 내 젊음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를 통틀어 회상해 보건대 내가 겪은 모든 희로애락의 삶을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호주의 날 아침 8시 반부터 바구니에 먹을 것을 들고 11번지 집 앞 길가의 넓은 잔디에 모인다. 우선 스티커에 이름과 집의 번짓수를 적어 가슴에 붙이고 인사들을 나눈다. 여기저기서 피크닉돗자리나 접이식 의자를 펴는 사람도 보인다. 바비큐와 뜨거운 물은 맬컴이 제공해오고 있다. 이웃들이 일년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하며 동네 소식을 나누고 유익한 정보도 나누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오랜 친구나 먼 친척이라도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이야기 꽃을 활짝 피운다. 어린 학생이 있는 집은 끼리끼리 어울리기도 한다. 매년 빠짐 없이 참석하는 이웃 중에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 산 부부가 있다. 나는 여태까지 이 집 부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날도 한껏 모양을 내고 참석했는데 구십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허리가 꼿꼿하고 건강해 보인다. 흰 바지에 멋진 디자인의 알록달록한 블라우스 차림으로 이색적인 목걸이까지 아주 잘 어울려서 멋있다고 한마디 했더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목걸이는 오래 전 티베트에 갔을 때 산 것이고 블라우스는 어디어디에서 샀는데 같은 디자인에 색상이 다른 것이 네 종류가 있어서 고르다가 그만 넷을 다 사버렸다며 웃는다. 그리고 몇 년 째 여름이면 이 블라우스 네 장을 번갈아 가며 즐겨 입는다고.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나는 이런 조그만 일에 재미를 느끼고 좋아라 한다. 시니어가 되니 단순해지는 걸까.
거리의 아침식사 하일라이트는 초대쪽지를 보냈던 맬컴 대감님이 사다리를 양쪽으로 펼치고 올랐을 때 시작된다. 1988년 시작된 우리 동네 아침식사 전통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는 말에 모두 박수를 쳤다. 작년에 동네 노인 테드와 린제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는 갑자기 주위가 숙연해 졌다. 100세를 바라보던 테드씨가 작년 초 혼자서 걷기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인데 아직 눈에 선하다. 린제이 할아버지도 90을 훨씬 넘기셨다. 부인이 안 보이길래 집에 오는 길에 우리 집 앞에서 대각선으로 있는 그 집 초인종을 눌렀다. 얌전한 로즈마리 할머니에게 가까이 살면서도 할아버지 돌아가신 것을 몰라서 미안하다며 조의를 표했다. 파킨슨병이 위중해져서 요양원으로 갔다가 작년 11월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고. 뒷마당의 수영장을 메꾸어 채소밭을 가꾸던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젠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는 할머니의 가냘픈 얼굴엔 쓸쓸함이 역력했다.
드디어 경품권 추첨이 시작되었다. 한집에 한 장씩 받은 티켓번호는 집의 번지수와 일치한다. 동네노부인 바바라씨가 매년 와인 두 병을 포장해서 호주국기를 꽂아 내 놓는데 올해는 30주년 기념으로 책까지 한 권씩 끼어있다. 십 년 전 내가 행운의 당첨자가 되었을 때의 흥분감이 되살아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해는 어느 집이 뽑힐까. 아침 식사에 나온 어린이 손에 잡힌 티켓 두 장 중 하나는 허리가 구부정해진 아주 연로한 부인에게 돌아갔다. 그 기뻐하는 모습을 모두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호주의 날 행운의 경품에 당첨 되었으니 이 분은 올 한 해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기를 염원해 본다. 나라면 그럴 것 같다. 와인 잔 옆에 놓고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즐기리라.
며칠 전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여니 낯익은 동네 어른 둘이 적십자 자원봉사자로 모금을 위하여 가가호호 방문 중이었다. 점잖은 노신사들에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적은 금액과 영수증을 기분 좋게 주고받았다. 이분들에게 동네를 걷는 일은 운동도 되겠지만 지역사회를 위하여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파문이 인다. 동네길가에서 이웃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는 전통이 새삼 고맙기만 하다. 나의 이웃 사촌들, 고마운 사람들이다.
*포섬: 캥거루와 코알라에 이어 호주의 아이콘으로 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
권영규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