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수도 없이 변하도록 살아온 인생에 봄은 헤아릴 수 없이 오고가며 수선을 떤다. 눈부신 황금빛 봄볕인데도 따라온 봄바람은 심술부리듯 얇은 봄옷 입은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든다. 이른 봄나들이를 무색하게 만들던 유년의 봄은 어렵게 겨울 난 흔적으로 얼굴은 까칠해져 있었다. 입 가장자리가 헐어 있고 크느라고 그렇다 하던 어른들의 웃는 소리가 따라다녔다.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꽃을 피우곤 했다.
한국전쟁으로 첫 돌을 못했으니 전쟁의 기억은 없고 그 후의 가난했던 기억만이 오롯이 남아있다. 물질적인 풍요는 언감생심이고 먹는 것조차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시절이니 언제가 봄날이고 가을이었던가는 아무리 뒤적여 보아도 찾을 길이 없다.
누구 내 인생의 봄날 좀 찾아 줄래? 멀리 있는 형제들에게 인사도 할 겸 전화로 물어본다. “누구 약 올려?” 그래도 동생들은 나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던 내가 무색해진다. “야, 너는 계란후라이 밥위에 얹어 싸갔다며. 나는 늘 무장아찌였어”하며 깔깔거린다. “언니는 유치원도 다녔잖아!” 그러니 할 말이 없다. 누구나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세대 전체에 봄날이 없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봄은 봄이로되 화려한 봄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병아리 솜털 같은 햇볕이 등을 간지르는 한낮에 또래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던 기억은 따사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세월은 흐르고 애잔한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모자라고 서러웠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전쟁 후의 어려운 시기를 고스란히 겪어온, 아쉬움 많은 세대라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의 누나들인 고모 셋이 학교 선생이다 보니 방학 때마다 할머니 계신 우리집은 북적거렸다. 고종사촌들이 갖고 온 학용품들이 내 것보다 좋아 보여 바꾸자고 생떼를 쓰던 내 모습도 보인다.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휑뎅그레 넓기만 한 방안에는 늘어놓고 어지를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만 조숙해진 애어른이 되었던 것도 같다.
엄마사촌 원명이 아저씨가 잠깐 동안 차렸던 조그만 만화가게는 가슴 두근거리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요술문 같았다. 연일 드나들며 쌓여 있는 만화책더미에 팔려 집에 갈 줄을 몰랐었다. 눈치 보며 공짜로 빌린 만화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엄마 몰래 집에 들어서던 뿌듯함은 어른이 되어서도 꿈속의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몸이 약했던 아저씨의 병원생활로 끝이 난 만화책과 같이 왔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앞마당의 화초들이 깨어나듯 수런거린다. 햇살 고운 앞마당에 나서면 봄의 소리가 팡팡 폭죽 터지는 것처럼 들려온다. 사계절의 봄, 내 인생의 봄, 각자 모든 사람의 봄을 계산하면 얼마나 많은 봄날이 오고 갔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왔나 하면 살짝 지나가버리는 봄기운이 아쉬워 내년을 기약하지만 한번 가버린 내 인생의 봄은 추억으로만 남을 뿐 돌아올 줄을 모른다. 점점 줄어드는 나의 봄날이 아쉽기는 하지만 긴 겨울 끝에 찾아오는 찬란한 시드니의 봄은 현재 진행형이다.
송영신 /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