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먹으며
차갑고 싸늘한 겨울 하루,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을 가진다. 음악의 볼륨을 조금 높이고, 문학회에서 독서 토론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펼친다. 혼자 있으면서 히터로 집안을 데우자니 마음이 거북한데, 추위는 점점 겹겹이 껴입은 옷과 몸을 조인다. 모닝커피의 기운도 사라지자 뜨겁고 매운 국물이 생각난다.
라면을 끓인다. 라면을 먹을 때면, 늘 영양 면에서 부정적이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이것저것 부재료를 준비한다. 싱싱한 무청 서너 가지를 손으로 뭉텅 잘라 끓인 물이 연초록색으로 솟구칠 무렵, 면과 매운 양념을 넣는다. 이어서 한국형의 길쭉하고 날씬한 가지 하나와 실파를 뿌리 채 숭덩숭덩 잘라 넣고, 국물이 다시 끓을 때 달걀을 추가해 살포시 저은 다음,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덮어 1분 정도 뜸을 들이는 라면… 맛은 어떨까? 작가 김훈(라면을 끓이며 31쪽 문학동네)의 레시피가 부럽지 않다. 그는 3분 이내에 조리하면서, 어린 시절 미군에게 얻어먹던 깡통 레이션의 맛을 떠올리며, 공업화된 양계장과 양식장의 먹거리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채 키워지는 과일나무들을 생각하다가, 라면이 끓어 넘쳐 맛이 그만 반감된 적이 여러 번이라고 하였다.
먼저 1/3을 시식하기로 하는데, 요즈음 시간 날 때마다 반복해서 듣고 있는 베토벤의 ‘에로이카’ 2악장이 시작된다. 장송곡이라 명명된 이 악장을 들을 때면, 명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가 생각나고 눈 끝이 시려지기도 한다. 암투병 후 복귀해 루체른 음악 페스티벌에서 앙상한 몸짓으로 혼신을 다해 ‘말러’의 곡들을 지휘하던 그가 그립다. 사년 전, 이태리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친구들이랑 발레를 감상하며 졸았던 아름다운 극장에서(새로운 상큼함으로, 두 콘서트 감상기 63쪽 시드니 문학 9집), 그 전 해에는 그곳의 음악감독이었던 아바도의 장례식 연주회가 있었다. 라 스칼라의 전통대로 극장에 관객을 들이지 않고, 그의 삶을 추억하며 에로이카 2악장을 연주하였다. 다만 바깥 광장에 모인 추도 시민들을 위해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중계했다고 한다.
라면발은 쫄깃거리고 무청은 푹 익어서 부드럽게 입안을 감싼다. 가지 맛은 또 어떤가. 금방 나도 유년의 집 뒤뜰로 돌아간다. 텃밭에 자라는 작고 매끈한 가지들, 보라빛 별꽃으로 피어나는 앙증맞은 꽃송이들, 어느 날 엄마는 애가지를 따서 내게 주며 맛보라고 하셨지. ‘엄마, 이거 그냥 먹을 수 있어?’ 의심의 표정을 짓자, 엄마는 빙긋 웃으며 먼저 맛을 본 후 내게 건네 주셨지. 아리고 달큰한 보라색 내 유년의 맛…
어떤 이는 라면을 끓이다가 사색에 잠겨 국물을 넘쳐흐르게 하고, 또 다른 이는 라면을 먹으며 음악에 열중하다가 음식을 식게도 하지만, 그 맛 속에 사유와 음률이 어우러진다면, 또 한 끼의 뿌듯한 밥상이 아닐까. 한때 서울에선 삼천 원짜리 라면 한 그릇을 먹고, 입가심으로는 건너 편 카페에서 육천 원하는 커피를 마신다는 아이러니가 유행했었다. 그렇다면 나의 후식은 교향곡의 선율인가. ‘아뿔사!’(구십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잘 쓰던 감탄사, 어릴 때 나는 이 소리를 들으면 깔깔 웃었다고 한다) 라면을 먹으며 교향곡에 장송곡을 들먹였으니 이 또한 삶의 재미난 비꼬임으로 여기고 싶다.
세계적으로 한국 라면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한류의 바람 따라 시드니의 대형 슈퍼마켓과 아시안 식품점에서는 오늘도 라면이 불티나게 팔린다. 기분이 좋다. 차가운 겨울 낮, 뜨거운 라면을 먹으며 ‘영웅’의 울림 안에서 내실없는 영웅심에 가슴을 녹인다.
김인숙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