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기적– 네팔 대지진 긴급구호 활동 이야기 2
네팔에서의 시간은 한국의 그것과는 매우도 다르게 흘러갔다. ‘빠르게’와 ‘느리게’만 존재하던 부사가 여러 가지 모양을 띄기 시작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앉아서 아무 말도 없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한없이 멈춰 있기도 하고, 여러 단체에서 파견된 활동가들의 베이스캠프는 보람차고, 역동적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덧 이곳에서의 일 수가 두 자리를 넘겨가고, 나는 이전과는 다른 생활 방식에 완전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샤워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며, 머리를 감을 때 꼭 샴푸와 린스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식사는 음식의 개수에 풍성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는 것, 밤새 내리는 비에 배낭의 모든 짐이 진흙탕으로 젖어도 아침볕에 말려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 중요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단순하고, 가벼운 삶의 방식과 기준을 배워가고 있었다.
재난발생시 많은 단체가 들어오기 때문에 우후죽순으로 각 단체가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네팔정부(고르카 지역재난대응위원회)와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UN OCHA), 그리고 여러 단체들이 함께 각 영역에서 인도하고 조정할 대표 단체를 선정하여, 그 선정된 단체를 필두로 현장에서 활동을 진행하게 된다. 우리 기관은 이번 네팔에서 여성, 아동,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보호 사업 영역’(Protection Cluster)을 책임지고 조정하는 단체로 선정되어 각 단체들의 활동 정보를 공유하고, 조정하는 Co-leading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필자가 일하는 단체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시작한 단체가 전 세계 유수의 INGO들 가운데서도 전문성을 인정받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감동이었다. 우리가 지금 돕고 있는 네팔도 언젠가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마음속에서 파릇파릇 싹을 틔워갔다.
삼성의료원 의료팀이 돌아가고 필자는 재난으로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을 경험하고 있는 네팔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필자가 일하는 기관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리적인 도움을 지원할 뿐 아니라, 아동 학대나 자연재해 등 다양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심지정서지원사업’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 생계가 어려울수록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소홀하기 마련인데, 어려운 상황일수록 마음 또한 다치기가 쉽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진을 경험하고 나면 아이들은 ‘건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지진 피해 현장에서는 아이들이 안정감을 느끼는 아동친화공간(CFS: Child Friendly Space)을 운영한다. 안정한 공터에 천막을 치고, 자체 제작한 워크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심리정서지원사업을 담당하는 국내 직원과 대학 교수진 등 전문 인력을 통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으며, 현지에서의 PTSD 예방 프로그램의 효과성과 지속성을 높이기 위하여 현지 교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필자는 프로그램 활동에 함께 투입되었는데, 아이들이 지진시 느꼈던 감정을 표출하는 미술 치료 시간에 그린 그림을 보며, 재난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울고 있는 사람들, 빨갛고 까맣게 표현된 사람들… 어른들에게도 극도의 충격적인 경험인데, 아이들이 감당하기에 얼마나 공포스럽고, 무서운 사건이었을지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미술치료, 놀이치료, 음악치료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공포감에서 벗어나 다시금 일상적인 감정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의료진과 함께 다친 환자들을 돕는 일만큼이나 흥미롭고, 보람된 일이었다.
몇 주간의 활동을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나는 내 이웃들을 여전히 여진이 있는 위험한 곳에 두고 홀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죄책감 아닌 죄책감에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네팔에 머무는 동안 있었던 잦은 여진의 영향으로 시시때때로 환(幻) 진동을 느꼈으며, 건물 안에서 잠드는 것이 쉽지 않아 매일을 공포로 뒤척여야 했다. 나는 밤마다 네팔로 돌아가 활동하는 꿈을 꾸었으며, 트라우마와 죄책감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나를 힘들게 하였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우리 기관에서 운영하는 ‘좋은 마음 센터’에서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심리치료를 받았다. 상담을 통해 현장에서 책임감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나 역시 난생처음 겪어야 했던 지진과 죽음에 대한 공포, 역할에 대한 긴장과 무게,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꼭 해결해야만 하는 죄책감의 문제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고, 또한 건강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도 숨 가빴던 네팔 긴급구호 활동은 이렇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필자에게 긴급구호 현장은 마치 광활한 사막 같아서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끝은 있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이웃들의 삶이 빨리 회복되길 바라는 전 세계 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이 함께 그 길을 가고 있어서, 비록 조금 더딜 수는 있어도 우리는 반드시 사막을 건널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오아시스도 만나고, 수줍게 피어나는 꽃을 보며 함께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사막을 건너 준, 그리고 건너 갈 사람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