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올 때 내 짐 속에는 적잖은 세월을 나와 동고동락한 친구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이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듬직했다. 그들은 돌 절구통, 약탕기, 항아리 이다. 호주에 짐이 도착해 이삿짐을 나르던 사람이 외국인지라 돌 절구통 용도를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이 집은 돌덩이도 가져 왔다고 자기네끼리 낄낄댔다.
한국에서 이 친구들은 제 몫을 잘해 냈다. 절구통은 메주 한 두 개 만들 정도의 크기 때문에 절구질 할 때 마다 온 몸을 흔들어 메주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약탕기는 식구들 보약 달일 때 몸통을 불에 달구어 가며 약을 달였으며, 항아리는 된장 고추장을 담글 때 자기 몸 모두를 내어 주었다. 그들이 긴 항해를 끝내고 호주에서 다시 만났지만 나는 바쁘고 그들은 할 일 없이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용지물처럼 힘을 잃고 있었다.
내가 한참 잘 지낼 때 반질반질 했던 한국에서의 생활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연탄불에 은근하게 달여지는 투박한 약탕기는 새로 구입한 매끈한 중국산 약탕기에 밀려 나게 되었고 매끈한 중국제품은 먼지 없는 찬장에 모셔져 있었다. 사람 팔자 알 수 없듯이 이들 팔자도 알 수 없게 됐다. 나는 듬직한 항아리를 워낙 좋아해 한국에서는 종가 집 맏며느리처럼 장독에 가득 찼다. 그 중에서 잘 생긴 것 몇 개 뽑혀 왔는데 그들 마저 버림 받은 것처럼 팽개쳐 있다. 나는 그들 앞을 지날 때 마다 무언지 모르는 아픔이 가슴속으로 스며 들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남의 나라에 적응 하느라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들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약탕기가 새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투박한 모습이 듬직하고 정겨웠다. 문화가 다른 며느리가 화분 하나를 약탕기 속에 넣어 새로운 삶으로 태어났다. 나는 약만 달여야 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용도를 모르는 며느리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변신 시켰다. 너무 멋스럽고 이런 화분 모양이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싶다. 약탕기 역시 새로운 삶이 만족 한 듯 활기를 품어내고 있는 듯 했다.
두터운 바닥 면이 오래오래 끓일 때 진한 맛을 낼 수 있었던 것처럼 볼 수록 진한 맛이 풍겨 멋스럽고 정겹고 푸근했다. 새 며느리가 들어오면서 집안 분위기며 정원도 이색적으로 달라졌다. 워낙 식물을 좋아하는 그녀는 이런 저런 화초 등을 사서 나르기 바쁘고 갈 때 마다 한국 정서가 아닌 이국적으로 집안이 변신했다. 한국 사람 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꽃과 나무 등이 여기 저기 심어있었다.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들어온 꽃과 나무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는 듯 했다. 지렁이도 키우면서 그 곳에서 흘러 나온 물을 거름으로 사용해 화초들을 잘 키우고 있었다. 우리네 고정관념으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꽃신 같은 신발도 바닥이 아닌 벽에 붙어 벽을 장식 했고 생각지도 못하는 물건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듬직한 친구들만 변신하나 했는데 세대가 바뀌면서 집안 모두가 송두리째 변신해 가고 있었다.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새로운 삶으로 거듭 나는 것 같다. 돌 절구통에
물을 담아 워터히야신스(Water Hyacinth)를 띄우니 집안에 작은 연못이 생겼다. 이 친구도 이민 와서 변신한 삶을 시작한 것 같다. 거실에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으니 운치도 있고 새로운 용도로 삶이 시작되니 새 기운이 집안을 활기 넘치게 한다. 곁눈질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때를 지나 돌아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을 때 나에게 보여주기 위함인가. 비단 이들 뿐이겠는가. 애들이 성장해서 각자 가정을 꾸리면서 새로운 기운들이 옛 친구들과 함께 집안 가득 메워지는 것 같다.
내가 이민 생활에 적응해 가듯이 이 친구들도 각자 자기 몫을 찾은 것 같다. 나도 은퇴를 했으니 옛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힘을 실어주고 싶다. 작은 항아리는 꽃병으로 새 삶을 시작하고 큰 항아리는 장을 담아야겠다. 시간 없을 때는 사서 먹기도 하고 지인이 주면 얻어 먹기도 했지만 옛날 내 맛이 아닌 걸, 올해는 코로나에 지친 가족과 지인들에게 맛있는 된장과 사랑을 함께 선물하면 어떨까. 항아리도 내가 관심 가져 주니 힘이 날 꺼야, 우리들 사랑의 힘이 다시 태어나 힘찬 나날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