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서방의 한인 1세와 1.5세들은 한국의 매체 환경에서 산다. 왜 그런가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시드니에 있으면서 한국 언론을 논하는 이유다.
정치와 언론은 태생적으로 같이 죽고 살아야 하는 밀접한 관계다. 그건 공생 아니면 적대 관계다. 늘 그래왔지만, 요즘 한국은 대선을 앞두고 ‘언론 때리기 (Media bashing?)’가 더하다. 그 와중에 오는 9월27일 국회 본회의 상정을 기다리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제출되어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그런 법은 아무리 잘 짜여져도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안될 것이고, 언론이 잘 못한다면 그 책임의 반은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해보는 데 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 슈람(W. Schramm, 1907-1987)은 한 나라 언론의 질과 수준을 정부, 언론 종사자와 수용자(소비자인 독자, 청취자, 시청자)의 3자가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건 굳이 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선진민주주의 국가일수록 정부가 언론에 대하여 간섭하는 일이 적다. 거의 자율이다. 기업이지만 사회의 공기(公器)이니 만큼 소유의 집중을 막거나 잘 못된 보도에 따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명예훼손법 등 한 두 개 입법이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시드니에서 일찍이 한국어 신문을 내본 적이 있지만 거주국 정부와 따로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관건은 수용자, 더 넓게는 한인사회에 있었다. 좁은 시장을 놓고 여러 신문이 치열한 경쟁을 버려야 하고, 단체장과 구성원들은 이 사회의 발전과 위상 제고와 후세의 장래를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그를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할 언론의 사정에 대하여는 알려고 안 하는 무관심이다.
한국의 경우도 그렇다. 사람마다 언론을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그 공적 기능의 질과 수준을 높이고 책임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하여는 수용자, 넓게는 국민의 언론에 대한 관심과 이해와 태도가 먼저지만 그 점을 깊이 파고 들려는 사람은 드물다.
가짜 뉴스
언론은 그 본질과 역할로 봐 일반 산업과 다르다. 그러나 일반 산업과 같이 이윤을 추구 하는 기업인 건 같다. 그게 정부의 기구로서 설립, 운영된다면 북한의 <노동신문>이 되고 만다. 한국의 언론이 잘 못하고 심지어 가짜 뉴스를 밥 먹듯 써댄다면 1차적으로 책임은 종사자인 기자와 언론인이 져야 하지만, 그 반은 수용자 몫이다. 1997년 영국의 다이애나 공주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때 그 원인이 오토바이로 그를 추격한 파파라치(Paparazzi, 유명인의 사생활 취재와 보도가 전문인 한 이태리 미디어 그룹)에게 있다고 알려져 비난이 이들에게 빗발쳤다. 그에 대한 파파라치의 대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고객들이 그런 뉴스를 즐긴다고.
가짜 뉴스도 마찬가지다. 요즘 한국인들은 화끈하거나, 빠르거나, 시끄러운 기사가 아니면 거들떠 보지 않는다. 많은 유투브 방송이 시사 프로그램에 다는 제목이 내용과는 전혀 다른 걸 볼 때는 이게 언론인가 사기인가 어리둥절해진다.
한국의 텔레비전을 보면서 법원 입구에 들어오는 피의자나 문제의 정치인들에게 많은 기자들이 매달리며 하지도 안 할 몇 마디를 들으려고 서로 밀치고 당기는 아수라장, 점잖게 말해도 되는 텔레비전 앵커가 ‘누구 빵집에 불 난 듯’ 고함을 지르는 걸 볼 때는 참 딱하다. 모두 독자, 청취자, 시청자를 하나라도 더 끌기 위하여 사주나 보도국 상사가 직간접으로 그렇게 시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오래 나는 전 현직 언론인이면서 미디어의 메카인 뉴욕에 가 언론인 교육을 받으면서 과정의 일부로서 매일 뉴욕타임스를 읽고 주요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해야 했었다. 위와 같은 언론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보지 못했고, 지금 호주에서도 마찬가지다.
뉴스란 무엇인가
또 영어를 좋아해 대학 2학년 때, 그러니까 1955년, 캠퍼스 영어신문 기자를 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그때만 해도 생소한 을 입수해서 읽었었다. 실무언론 공부(Applied journalism)에서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과제는 무엇이 뉴스냐(What is news?)이다. 거기에 그 대답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 당시에는 대학에 언론학과가 없었고, 어쩌다가 언론 이론을 강의하는 교수는 이 책에 많이 의지했었다. 여기에서 그가 나열한 10여 가지 뉴스의 조건으로서 갈등(Conflicts)에 대하서만 마지막으로 몇 마디 쓰겠다. 전형적인 갈등은 싸움이 아닌가. 구경치고 싸움만큼 재미있는 건 없다고 한다. 폭력은 나쁘다면서 길거리에서 주먹 싸움이 벌어지면 모두 뺑 둘러서서 구경했었다. 요즘 대선에 앞서 텔레비전을 보면 언론이 싸움을 만든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짜 뉴스일지라도 그 런 자극적인 없으면 게 언론의 수용자는 크게 줄어든다.
김삼오 /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