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불경-선동적 내용’ 등 세 가지 도덕적 기준 유지
인터넷 기반의 오픈 정보시대, 디지털 콘텐츠 검열 갈수록 어려워
호주 어린이 도서협회(CBCA – The Children’s book Council of Australia)에서는 1945년부터 연례행사로 매년 1주일을 도서주간(CBCA Book Week)으로 정하고 호주 전역의 초중고 학교들과 도서관들에서 협회가 선정한 호주 도서들과 작가들, 삽화가들에 대한 홍보와 행사들을 벌이면서 청소년들에게 독서를 장려한다. 지난 8월17~23일 동안 치러진 올해 도서주간의 주제는 ‘책은 우리의 삶을 밝혀준다’(Books light up our lives)였다. 올해 독서주간 마지막 날인 지난주 8월23일 ABC 방송에서 호주의 도서 검열과 금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다뤄 눈길을 끌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 <어머니>(막심 고리키), <노동계급의 민족이론>, <반제반파쇼운동론>, <한국사회구성체논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 논쟁>,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철학의 기초>(블라소바), <사회구성체 비판과 사회과학방법론>(이진경)…
한국에서 1970/80년대 단골 서점 주인에게 은밀히 부탁하거나 ‘운동권’에 있었던 이들이라면 선배들의 ‘명령’으로 정독하고 토론을 펼쳤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이 서적들은 한국 군부정권 당시 대표적인 ‘금서’ 목록에 올랐던 일부 제목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금서는 기존의 정치, 안보, 규범, 사상, 신앙, 풍속 등의 저해를 이유로, 정부 당국의 법률이나 명령에 의해 간행-발매-소유-열람을 금지한 서적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금서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중세 시기인 1559년 교황 파울루스 4세가 금서목록을 펴낸 바 있다. 바티칸공의회 이후 1966년에 폐지될 때까지 42회나 개정, 증보된 이 목록에 수록된 책은 모두 4,126권이나 되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루소의 <사회계약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을 포함해 데카르트, 홉스, 흄, 로크, 밀, 몽테뉴, 몽테스키외 등 서양 철학과 문화계를 대표하는 지성들의 저술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에서도 조선왕조 시대에 이미 금서가 있었다. 태종, 세조, 성종 등은 혹세무민하는 도참서와 음양서를 압수하도록 지시하였고 양명학, 노장사상, 불교 관련 서적들을 포함, 조선 후기 들어서는 서학(천주교)에 대한 책들도 금서로 지정했다. 연산군은 자신을 비난하는 투서가 한글(언문)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한글로 된 책들을 모조리 금서로 지정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금서는 아마 <정감록>일 터이다.
유신 정권의 박정희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부 독재 당시는 금서와 관련해서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80년대 중반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에피소드가 대표적 사례이다. 외국 학술대회에 참석한 한 교수가 원서 몇 권을 들고 돌아왔는데, 거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Max Weber)의 저서도 있었다. 공항 세관원은 ‘막스’의 책은 금서이므로 압수하겠다고 했다. 교수는 “이 책은 ‘그 막스(Karl Marx)’가 아니라 다른 막스”라고 설명했으나 세관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쨌든 막스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군부 정권은 금서를 단속하고 학생운동 인사를 잡기 위해서 각 대학 교문 앞에 경찰을 배치했다. 진을 치고 있던 경찰들은 의심 가는 학생을 붙잡고 가방을 뒤지기도 했다. 이때 나온 에피소드도 유사했다. 막스 베버의 저서를 보고 “이거 막스(칼 막스) 책이잖아? 너 빨갱이지?”라며 경찰서로 연행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도시전설’ 중 하나이다.
당시 한국의 금서 목록에 대한 흔한 농담 중 하나로, 정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책의 저자는 맨부커-공쿠르-세르반테스-퓰리처-횔덜린-노벨문학상에 버금가는 영예라는 자조적인 말도 있었다.
호주, 도서유통 제한에
엄격한 도덕적 기준 적용
국가 차원에서 금지된 서적 목록을 작성해 특정 서적의 유통 열람을 막았던 것은 호주 또한 예외가 아니다. 호주는 상대적으로 짧은 국가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두드러진 이념 논쟁이 덜했고, ‘금서’를 정하는 기준도 한국의 군부 독재 시절과 크게 달랐지만 도덕적 기준은 상당히 엄격해 의외로 많은 도서들이 판매 금지 목록에 올랐다.
호주의 문학 연구자들은 20세기 서구 국가들 가운데 호주가 도서 검열에서 가장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다는 것에 동의하는 편이다.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쾌락을 추구하는 도서의 경우, 호주 도서 검열법에 따라 음란도서로 간주돼 호주 세관을 통과할 수 없었다.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 재키 콜린스(Jackie Collins)의 <The Stud>(1969), 브렛 이스턴 엘리스(Bret Easton Ellis)의 <American Psycho>(1991)는 한때 호주에서 금지된 도서들이었으며, 이외에도 수백 권의 도서들이 ‘금지목록’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편화에 따른 정보 개방시대를 살아가는 요즈음, 도서자료를 검열하는 당국의 방침은 구식처럼 보이거나 혹은 방침이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과연 특정 도서의 ‘금지’는 여전히 시행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지난 8월17일부터 23일까지는 호주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독서를 권장하는 이른바 ‘Book Week’였다. 독서주간 마지막 날인 지난 주 금요일(23일) ABC 방송은 NSW대학교 문학연구원인 니콜 무어(Nicole Moore) 교수를 통해 호주의 도서 검열과 금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다뤄 눈길을 끌었다.
무어 교수에 따르면 호주 세관(Australian Customs)은 이제까지 사회보호 명목으로 호주로 반입되는 도서들을 검열해왔는데, 이는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세 가지 법적 기준인 외설과 신성모독(불경), 선동적 내용으로부터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고 도덕적 기준을 유지한다는 취지였다.
“deeply and extremely disgusting…”
1991년 출간된 이스턴 엘리스의 <American Psycho>는 뉴욕의 잘나가는 한 ‘여피’가 벌이는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행각이 소재이다. ‘사이코’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과장된 남성성의 뒤틀린 단면을 그려낸 소설로서 영화로도 제작됐다.
출간 이후 이 작품은 영국 시인이자 소설가, 맨부커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앤드류 모션(Andrew Motion)으로부터 “deeply and extremely disgusting”이라는 혹평을 받은 바 있다.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보여주는 주인공의 끔찍한 살인행각을 묘사한 이 작품은 호주 도서검열법에 따라 불경, 외설, 음란 내용에 해당된다 하여 ‘R18 등급’(R18 classification – ‘Australian Classification Board’의 도서 및 영화관람 기준)으로 분류됐다.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서점에서 구매하거나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포장되어 고객에게 전해진다.
무어 교수는 “1933년 도서검열위원회(Book Censorship Board)가 설립되어 호주 세관의 힘이 줄어들었지만 도서금지 기준은 여전히 엄격하게 적용되어 왔으며 금지된 도서를 소지한 이들은 범죄자로 기소될 수도 있었다”며, 이어 “외설적 내용을 담은 도서들이 몰래 들어옴에 따라 반입금지에 그치지 않고 경찰, 수사요원, 우편규제, 민-형사 기소까지 강하게 통제됐다. 금지도서 목록이 미디어에 명시되는 것 또한 일상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환경 속에서도
도서 검열 및 통제 여전
호주는 여전히 정부가 정한 기준을 위배하는 도서에 대해 제한을 두고 있다. 무어 교수는 “하지만 오늘날 도서금지가 현대적 환경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운 상황이다”고 말했다. “호주의 독서 대중에게 전달되는 특정 도서에 대한 제한과 통제 의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인터넷을 규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전에 검열을 받았던 도서나 디지털 콘텐츠를 모니터링 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호주는 관련법에 따라 여전히 특정 도서를 ‘금지’ 또는 특정 연령 이상으로 유통 및 판매를 ‘제한’시킬 수 있으며, 이런 도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영화 및 도서분류위원회(Film and Literature Classification Board)가 관리하는 규정에 따라 도서를 포함한 모든 출판물들이 통제받고 있다”는 것이 무어 교수의 설명이다.
<배트맨>도 ‘금지’ 목록에 있었다
시드니 남부, 사우스코스트 지역(South Coast region)의 공공도서관인 나우라(Nowra) 소재 숄헤이븐 도서관(Shoalhaven Library)은 올해 ‘도서주간’을 기해 흥미 있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이전에 ‘금지 도서’로 분류된 바 있던 40권의 책들을 같은 색깔의 포장지에 가린 채 특정 공간에 진열해 놓은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도서관 이용자들로 구성된 북클럽이 제안한 것으로, 도서관의 자료들 가운데 금서로 지정된 바 있었던 도서를 선택하여 읽은 뒤 북클럽 모임에서 독서토론을 가지자는 것이며 또한 많은 이들에게 이런 도서들을 읽어보도록 권장하기 위한 취지이었다.
진열된 도서는 오늘날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 신성모독, 음란, 불경스런 내용이 덜한 책들로 선정됐다. 도서대출자들은 책들이 같은 색깔의 포장지에 가려져 있기에 안에 어떤 책이 있는지 모르게 돼 있는데, 숄헤이븐 공공도서관 도서관리 매니저인 젬마 럭스포드(Gemma Luxford)씨는 “기본적으로 이 아이디어는 전 세계 어딘가에서, 언젠가 한 차례 이상 ‘금지도서’ 목록에 올라갔던 도서를 읽어보도록 권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번에 포장, 진열해 놓은 책들 중에는 <Frankenstein>, <Brave New World>, <The Dubliners>, <Lolita>가 있으며, 한때 영국에서 금지 목록에 올랐던 <Batman>도 있다”고 밝혔다.
이 이벤트에 대해 무어 교수는 “이전에 검열된 바 있던 도서자료를 전시하는 것이 독서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이는 좋은 방법”이라는 의견이다. “우리(호주)는 투명한 규제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무어 교수는 “독자들이 이런 책들을 읽어봄으로써 ‘금지’시킨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또 그런 결정이 과연 합리적인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올해 호주 어린이 도서협회(The Children’s book Council of Australia)에서 정한 장려도서들의 목록(CBCA 2019 Short List)은 동 협회 웹사이트에서 검색할 수 있다. https://cbca.org.au/shortlist-2019)
■ 역사를 통해 본 도서 검열 기준
-음란물 및 성적 대화(sexual dialogue)
-동성애
-폭력
-마법(사악한 목적의)
-불경스러운 대화
-안락사
-산아 제한(Birth control)
-낙태
-정치적 편향
김지환 객원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