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갱년기 극복 비결
조선시대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되지 못했고, 거의 대부분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50대에 사망했다. 당시의 40세는 요즘의 50대 중반 정도에 해당되므로 하필 남성갱년기가 올 즈음에 홀로 유배지에 남겨진 선비들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산 정약용도 그러한 경우다. 그는 정조가 승하하자 대역죄로 몰려 40세부터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집안이 풍비박산 당하고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했으니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었고 갱년기 장애가 나타나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양생법을 잘 실천해 건강을 보전했던 듯하다.
40세 이후의 모든 남성들에게 생길 수 있는 일
갱년기장애가 생기면 우울증, 위장장애, 전립선염, 전립선비대증, 성기능 장애 등이 생기기도 하고 노화도 촉진된다. 40대 중반 무렵부터 생식 능력이 떨어지면서 호르몬 분비가 감소되고 면역계통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뇌세포가 위축되고 신경계통의 활동도 저하되어 정신적으로 허약해진다. 퇴직 및 실직과 같은 중년의 위기, 배우자와의 불화 같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근심을 낳고 이 모두가 갱년기장애를 촉진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갱년기장애 증상이 확실히 나타날 경우에는 노화도 빨라진다. 주 원인은 신장의 음기와 양기의 하락이다. 선천적으로 허약하거나 섭생장애로 인해 소화계가 손상되거나 과로 등으로 노화가 빨라지는 것이다.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횟수가 많아지는 것도 노화의 한 원인이다.
다산의 비결
다산이 남성갱년기를 극복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다산은 귀양지인 전남 강진의 바닷가 마을에서 매일 그림 같은 바다를 감상하며 걸었다. 야생 차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진 산길을 꾸준히 걸으며 심란한 마음을 떨쳐내었을 것이다. 이처럼 날마다 허리 체조를 하고 40분 이상 약간 땀이 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걸어야 효과가 있다. 이 방법은 특히 과체중의 남성들에게 더 추천하는데, 면역력 관리에 탁월한 방법이다.
다산에겐 운도 따랐다. 그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 귀양을 갔지만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에서 그를 보살폈고, 강진 인근에 살던 부친의 친구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부호였으며 훗날 사돈이 되는 그의 아들은 다산의 죽마고우였기에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당대 최고의 학자가 시골에 오니 인근에서 자손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 줄을 이었다. 요샛말로 하면 최고급 과외선생을 모셔가려는 시도가 끊어지지 않았기에 다산은 식생활 면에서도 나름대로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극심한 당쟁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 속에서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산책을 일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한 것이 장수의 결정적 비결이었다. 자신의 식사를 담당하던 젊은 여성을 소실로 삼아 정신적 위안을 받았던 것도 장점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부잣집에서 전라도 음식을 익힌 솜씨 좋은 여인으로 지친 그의 심신을 회복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것 같다. 즉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한 성생활을 누린 꽤나 이상적인 귀양살이를 한 셈인데, 이와 같은 기본적인 조건들이 충족된 상태라 엄청난 저술 활동도 가능했다고 본다.
필자가 확인해본 바, 다산의 사주는 화(火) 투성이라 성격적인 면에선 조금 미흡한 점이 있었다. 사주에 화기(火氣)가 강하면 계몽적인 기질이 무척 강하다. 물론 그래서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나 흠흠신서(欽欽新書)같은 행정이나 법률서를 쓰기도 했고 본인 스스로도 유배지에서 적잖이 선생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주에 화기가 지나치면 일에만 투신하고 몸은 돌보지 않으니 건강을 해치기 십상이다. 중년의 귀양살이가 그의 인생에서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때론 화가 복이 된다.
김태련 /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02 9787 3567 / 0434 262 800
www.kimsholisticmedic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