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가는 길-2
인도에 체류했던 1년 간 필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으나 그 중 가장 장기간 교류했던 사람은 델리의 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J였다. J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휴학을 하고 인도로 유학 온 21세의 어린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 검소한 성품으로 타국 생활을 꿋꿋이 견디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뉴델리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재래시장의 한복판에 위치한 옥탑 레스토랑에서였다. 정오의 햇살이 따갑던 어느 봄날, 끓어오를 듯 왁자지껄한 시장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짜이차를 마시던 필자에게 바로 옆 식탁에 앉아있던 가무잡잡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나는 델리에 들를 때마다 그녀와 해후하며 잠시나마 장기 여행의 피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필자가 기억하는 그녀는 줄곧 인도의 열기 속에 존재했고, 그렇기에 우리가 만날 때면, 우리 곁에는 늘 뭔가 마실 것이 놓여 있었다. 인도 중서부의 아우랑가바드에서 일주일 이상 머무르다 그녀에게 돌아갔을 때였다. 그 날도 우리는 파라솔 아래에서 얼음을 띄운 홍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나는 J에게 아우랑가바드가 어찌나 무덥고 척박했던지 아잔타 석굴을 관람하는 일이 고행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를 신이 나서 떠들었다. 과장이 아니었다. 기원 전 1세기경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7세기에 완성되었다는 이 불교 동굴사원은 석굴만 무려 29개에 달했고 근처의 엘로라 석굴까지 합치면 대충 구경한다 해도 며칠이 걸리는 고된 일정이었다. 그늘진 곳엔 어디라도 모기떼들이 한 움큼씩 피어올랐다. “2년 전 여름,0 기차로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달릴 때 나도 그렇게 힘들었어요. 75도였으니까요. 불바다 속을 통과하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회상했다. 그렇게 J는 신장성의 모래사막을 가로지른 뒤 현지인의 고물 트럭 뒷칸에서 보름이나 구토에 시달리며 티베트로 갔고, 수도 라싸에서 다시 인도로 가는 여정을 겪어냈다.
그녀가 한국에서 곧장 인도행을 택하지 않고 굳이 티베트으로 갔던 이유는 티베트 고원의 서부에 위치한 카일라스 산(불교의 수미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인적 없는 그 산을 장장 사흘에 걸쳐 홀로 순례하였다. 카일라스는 인간에게 정복된 적 없는 선성불의 성소이자, 황금과 수정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산이다. 이 세상의 중심에 솟아 있으며 정상엔 제석천이, 중턱엔 사천왕이, 기슭엔 인간계가 그리고 그 아래에 지옥이 존재하기에 그 주위를 108번 돌면 과거의 업장이 모두 소멸되고 금생에 성불에 이른다는 것이 티베트 불교의 우주관이었다. 수행자들은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이 성산을 방문하는 것이 꿈이었다. 불자도 아니었던 J는 19세에 그 카일라스를 목도하였다. 가족들이 딱히 불교를 신봉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를 그곳으로 인도한 스승도 없었다. 중학생이었던 J는 어느 날 우연히 카일라스 사진 한 장을 접한 이래 이 눈 덮인 검은 바위산에 가고야 말겠다는 필생의 원을 세웠던 것이다(이 산의 형상이 궁금한 독자들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길 바란다. 아마 죽어도 혼자 갈 엄두가 안 날 것이다.)
“종일 잠시도 쉴 새 없이 걸었어요. 당일 버틸 물과 식량이 든 배낭을 지고요.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죽도록 걸으면 간신히 다음 사원이 보여요.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어둡기 전에 반드시 도착해야 했어요.” 그녀는 매우 담담하게 자신의 기이한 여로를 묘사했다. 첫날 그녀는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건강은 양호한 편이라 걷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행장을 풀고 간소한 식사를 했다. 몇 시간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뜨자 그녀는 왠지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서늘한 기후임에도 길 위엔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동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 인자가 버티고 있듯 그녀의 머리 위로는 아득히 푸르른 하늘뿐이었으며 발 아래에는 흙과 돌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아무런 팻말도 없는 적막한 길을 줄곧 걷다 보니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왕 나선 길,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 간신히 도달한 불교 사원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이튿날 그녀는 다음 사원을 향했다. 그렇게 꼬박 사흘을 걸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여전히 혼자였던 그녀에게 외로움과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배낭은 한없이 무겁고 발바닥은 욱신거렸다. 괜한 짓을 했나, 싶은 막막함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징징 울며 발을 끌다시피 하는데 별안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본 적 없는 한 승려가 그녀를 추월하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그 때만큼 사람이 반가웠던 적이 또 있을까? 깊은 산중에서 그녀는 나이도 국적도 분간할 수 없는 초면의 비구에게 죽자사자 매달렸다. 그가 동행해 준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잠시 걸어 주었다. 그러나 겨우 이삼분 쯤 지났을까? 그는 어느새 J보다 몇 미터나 앞에 있었다. 그녀는 달리다시피 그를 따라잡았다. 그러나 그는 금세 몇 십 미터쯤 앞에 있었다. 뛰어도 뛰어도 그와의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듯 몇 분 내에 그는 그녀의 시야에서 불현듯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모든 잡념이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열심히 걷고 또 걸어 취침시간이 다 되어서야 주변 전체가 바위뿐인 두 번째 사원에 도착했다. 마침 그 곳을 지키던 티베트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혹시 방금 오신 스님이 안 계신지 급히 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내일은 그를 따라 나서야 할 테니까. 그러자 티베트 스님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다녀간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렇다고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일대엔 유숙할만한 곳이 없으니까요. 즉 그 사원을 거치지 않고는 절대로 순례를 마칠 수 없게 설계된 것이지요.”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드디어 최초의 순례지로 돌아온 그녀는 상주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승려의 인상착의를 설명했으나 그런 이를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지난 며칠 간 성산을 방문한 사람은 오로지 그녀 한 사람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 때문에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이렇게 청소년기 내내 절실히 갈망했던 카일라스 순례를 마치고 J는 미련 없이 자신이 갈 길을 정하였다. 최종 목적지였던 인도는 철학을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이라 그 길로 델리에 정착했단다. 인도를 떠난 후 필자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었으나 수년이 흐른 뒤 지인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한국으로 돌아가 좀 더 세상을 체험한 끝에 가족들의 만류를 딛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사막과 설산, 그리고 폭염의 땅으로부터 십년에 걸친 구도를 선택한 그녀. 사람이 무언가를 이루려면 ‘한 세상 안 태어난 폭 잡아야 한다’는 도문의 표현처럼 철저한 자기주관과 신념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온 그녀가 숫타니파타(불교의 초기 경전)에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카일라스를 본 것이 이제 이십 년이 다 되어가니 그녀도 그 승려가 누구인지 아마 알아차렸을 것이다.
대개 사람이 갈 길은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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