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가는 길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 철학강의를 자주 접하는 편이다. 주역이 예견한 정신문화의 시대가 멀지 않았기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유튜브(youtube.com)엔 온갖 교양 강좌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개중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좀 미심쩍은 도인(?)도 있고 신촌 등지에서 몇 십년간 철학관을 운영하다가 추종자들에 의해 ‘거룩하신 스승님’으로 등극한 이도 있다. 앞으로 10년도 채 남지 않은 빛의 시대가 오기 전, 한국인들은 일종의 사상적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도사들이 판치는 현상이 좀 뭐하긴 하지만 한국이 드디어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했다는 점만은 매우 고무적이다. 듣다 보면 이따금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들의 말도 영 틀린 건 아니다. 모두들 각자의 영역에서 평생 고군분투했고 나름대로 프로 정신이 있을 테니 일단 들어 보고 옥석을 가려내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걸맞는 구루(영적 혜안을 갖춘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를 찾아내려면 이 정도의 수고는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
며칠 전 필자는 퍽 진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한 강좌를 접하게 되었다. 유불선을 넘어 기독교 교리까지 섭렵했다는 한 젊은 철학가가 제자들의 질문에 충실히 답하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선 약간 소크라테스 문답법을 연상시키는 동양학 강의였다. 이 날의 주제는 인간의 ‘혼백’이었다. 그는 약 한 시간에 걸쳐 열심히 혼백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혼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이미 기원전부터 있었다.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라는 도교적 차원의 고찰로부터 혼은 의식이고 백은 무의식이라는 현대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혼백은 각 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줄기차게 연구되어 왔으나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는 오래 전 필자가 한의대에 재학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정신과학 교과서의 첫머리에 혼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었으나 당시 미숙했던 필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뼈 안에 남아 언젠가 먼지처럼 흩어진다는 설명에 그저 한두 번 고개를 주억이다 무심히 흘려보냈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었으리라. 패기 넘치는 구루의 사유에 기꺼이 합류하다보니 어느새 나의 기억은 십수 년 전의 갠지스 강가를 더듬고 있었다. 과거 필자는 인도를 장기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가벼운 배낭 한 개만 달랑 꾸려 홀연히 인도로 떠났던 것이다. 목적지도, 기다리는 이도 없었다. 아무런 기약 없이 필자는 마치 거대한 우주의 부름을 받은 듯 무작정 편도 티켓을 끊어 델리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로부터 대략 1년간 인도 전역을 유람하였다. 그리고 최북단의 라다크, 카슈미르 지역부터 최남단의 카냐쿠마리까지, 동단의 무역항인 캩커타에서 서쪽 끝의 사막 땅 자이살메르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종횡단했다. 머리속엔 인도 아대륙의 지도가 스캔된 이미지처럼 선연히 떠올랐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던 정열이 여로에 대한 차분한 감상으로 변해갈 무렵 필자는 인도의 종교 및 문화의 수도이자 사원의 도시, 갠지스 강이 흐르는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에 마침내 입성하였다.
바라나시의 첫 인상은 좀 우중충했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바라나시가 위치한 우타르 프라데쉬 주는 인도 내에서도 유난히 가난한 지역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 이른 새벽에 기차에서 내린 필자의 눈앞에 역 안을 빼곡히 채운 걸인들의 정경이 펼쳐졌다. 널브러져 잠든 그들의 몸을 밟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그리고 여기저기서 번뜩이는 그들의 집요한 눈빛을 감지하며 필자는 반쯤 패닉상태가 되어 서둘러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행자들의 숙소가 밀집된 갠지스 강 유역에 다다를 때까지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였다. 불교 성지가 인근에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싯다르타가 왕자였던 그 시대에도 이 땅엔 거지들이 넘쳐났던 것일까? 그래서 그는 왕좌를 버리고 민중의 고(苦)에 동참했단 말인가?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필자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도착 전 예약해 두었던 게스트 하우스는 지독히 허름했고 아직은 손님을 받을 수 없다는 직원의 불친절한 태도에 필자는 또 한 번 진저리를 쳤다. 배낭만 간신히 맡긴 채 나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강가를 향해 걸었다.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기차역과는 달리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갠지스 강은 매우 발랄했다.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여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했다. 강의 얕은 지대는 세수를 한다, 머리를 감는다, 일찌감치 빨래를 한다, 하는 인파로 북적였고 카페들은 아침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든 히피 차림의 외국인들로 이미 만원이었다. 필자 역시 몹시 허기진 상태였다. 채식이 주를 이루는 대부분의 인도 식당에선 풍성한 고기 메뉴를 찾기 어려워 몇 달째 정체불명의 카레와 감자, 과일 따위로 연명하던 터였다. 문득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다. 그 때 어디선가 향긋한 바베큐 냄새가 필자의 후각을 자극했다. 근처에 주로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갈비를 구울 때 풍기는 고소한 향기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주인 없는 개들도 한 마리씩 모여 들었다. 마침 저만치 물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필이면 인도인들이 가트(물과 뭍을 연결하는 층계)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 중인가 보다. 허! 허!
내친 김에 필자는 가까이 다가갔다. 현지인들 몇 명도 구경 중이었다. 높게 쌓인 장작의 불길이 거세지면서 사방으로 검은 연기가 흩날렸다. 자세히 보니 한참 잘 타고 있는 덕석 안쪽에서 누런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고기 냄새는 그 기름에서 나는 것이었다. 개들은 한 방울이라도 핥아보려고 바싹 다가서서 신경전을 벌였다. 불을 붙인지 한 이십여분 되었다고 지켜보던 사내가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이십분쯤 지나자 덕석 바깥으로 삐죽하게 빠져나온 바싹 야윈 막대기 같은 것이 기름과 함께 똑 떨어져 나갔다. 장작마저 허물어져 갔다. 다시 새 덕석에 둘둘 싸인 뭔가를 인도인 두 명이 어깨에 지고 계단을 내려왔다. 친절한 사내는 통상 15분에서 30분 간격으로 시신이 도착한다고 필자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재가 흘러 들어간 강물은 검게 변하고 바로 옆에선 할머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빨래를 널었다. 나들이 온 인도인 가족은 정박한 배 한 척을 두고 시간당 얼마를 받을 것인지 선주와 흥정 중이었다. 한 구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데는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날 필자는 아무런 푯말도 없는 강가의 한 화장터에서 배고픔을 잊은 채 한참이나 서있었다. 가끔 하얀 재가 내 쪽으로 날렸다. 아직 다 타지도 않은 잿더미 위에 장작이 다시 올려지고 또 다른 시신이 안치되었다. 젊은 구루가 설한 대로 망자들의 혼은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을까? 그리고 그들의 백은 뼛가루와 함께 화마 속에서 온전히 소멸했을까? 성리학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기가 흩어지고 모이는 작용’이라고 이해했다. 한의학은 ‘혼은 정신, 백은 인체의 경락을 따라 흐르는 에너지’로 보았다. 하니 매장이 아닌 화장을 택할 경우 망자의 혼백은 바로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셈이다. 그것도 썩 나쁘진 않다.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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