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
무역업무를 취급하는 사람들에게는 B/L 이라는 친숙한 영어표기가 있다. Bill of Lading의 약자다. A detailed list of a ship’s cargo로 배로 물건을 운송할 때 작성해야 하는 서류다. 유식하게 설명하자면 ‘해상 운송 계약에 따른 운송화물의 수령, 또는 선적을 인증하고 그 물품의 인도 청구권을 문서화한 증권이다’. 선박은 이 증권에 기재된 조건에 따라 운송하며 B/L은 ‘지정된 양률항에서 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에게 그 화물을 인도할 것을 약정하는 유가증권이다’. (갈수록 줄어드는 한글 어휘력으로 상심에 빠진 호주내 한인들에게 이해가 되려나?) 그래서 무역업무를 취급하는 사람들은 B/L이란 일점일획까지 철처하게 작성되어야 하는 서류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의뢰를 받아서 물건을 A항구에서 B항구까지 운송해 주는 선박의 입장에서는 물건들이 실려 있는 콘테이너를 운송해주는 책임만 있기에 일반적으로 물건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B/L에 운송자(선박주)는 그 누구도 고소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선박임자는 수출자, 수입자, 수령인, 통관업체, 관세사 등등 B/L에 명시된 그 누구를 상대로라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이미 수백 년간 유럽의 부유한 상인들의 무역전통을 통해서 구축되어 있는 것이고 아직까지 대형 운수업체들이 사용하고 있다.
호주에 거주하는 수만 명의 한국인들에게 한국식품점이 없다면 호주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오는 수백 가지의 가공식품이 우리 삶의 정서를 윤택하게 하기에 그렇다. 그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어묵이다. 호주에서 태어난 한인 아이들도 어묵은 좋아하더라. 이제는 호주에서 생산되는지, 아직도 한국에서 가져오는지 알 수 없으나 5-6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어묵을 수입했던 식품도매상 업체들이 호주에 있었다.
그중 한 수입업체가 한국의 식품 도매상에게 $25,000 어치 어묵을 주문하였다. $25,000을 지불하고 호주 부두에서 물건을 받아줄 관세사도 선임하였다. B/L이 작성되고 물건은 세계 최대 독일 국제상선회사 선박에 실려 인천항을 떠나 적도를 지나서 시드니 항구에 입항하게 되었다. 시드니 부두 하역장 크레인이 어묵이 실린 콘테이너를 배에서 들어 부두로 옮기는데 콘테이너에서 물같은 액체가 줄줄 새고 있는 것이었다. 부두에 내려놓자 마자 코 찌르는 악취에 아무도 근처에 갈 수 없었다. 아뿔사! 어묵을 독일 상선에 실은 한국 수출업체의 말단 직원이 B/L 작성시 콘테이너 온도를 -25C° 대신 25C°로 기재했던 것이었다. 썩은 어묵을 시드니 근교 쓰레기 매립지에 옮겨 묻는 비용, 콘테이너 살균처리 비용 등 $40,000이 발생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어 아무도 나서지 않자 결국 어묵 처리 비용은 선박회사가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 독일 선박회사는 국제적 대형 로펌에 의뢰하여 시드니의 관세사를 법원에서 고소하였다. 시드니 관세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시드니 법원에서 최종 재판를 치루기 전에 합의가 가능한지 중재를 가지게 되었다. 선박주가 선임한 국제로펌의 변호사들이 줄줄이 중재실로 입장한다.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국제적 로펌이라 한국에도 사무실이 있고, 당신들의 의뢰인도 독일의 국제회사라 한국이 낯설지 않을 터인데 왜 애꿋은 시드니 관세사를 고소하는 것이지요?”
“한국사법제도는 Unreliable 하고 Unpredictable 하기에 가능하면 한국에서의 소송은 피한다는 원칙이다.”
불철주야 입시준비에 정진하는 고등학교 과정을 통해서 엘리트들로 선별된 사람들이 불철주야 고시준비해서 법조인으로 활동하는 한국의 법과 절차가 신뢰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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