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불행히도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른다
흔히 드라마나 연극 또는 무대 공연 예술 상징으로 두 개의 가면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의 비극적 가면과 희극적 가면을 뜻한다. 찡그리거나 화를 내거나 울고 있는 가면은 비극을 상징하는데 이는 힘의 연극이다. 웃는 얼굴은 희극을 상징하는데 이는 마음의 연극이라 한다. 여기서 힘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일까.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media Di Dante> 첫째 편인 지옥 <The Inferno>을 보면 지옥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 죄악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포르자’(Forza)라 부르는 힘과 폭력의 죄악이고, 다른 하나는 ‘포르다’(forda)인데 이는 마음의 범죄를 뜻한다. 과연 힘의 범죄와 마음의 범죄, 어떤 범죄가 더 큰 죄악일까.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힘의 범죄와 마음의 범죄 경계는 없는 듯하다. 해외에 나와 살고 있어도 한국의 정치 사회 정세에 대한 얘기를 배제한다면 대화의 창을 열 수가 없다. 오히려 호주 정치 사회 이야기보다 한국 소재에 대해 할 얘기가 많다. 최근 한국의 사태 중에서 우후죽순으로 숨어있던 청소년 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야기되었다.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던 그들에 대한 처벌과 그 후의 이야기들이 더 가슴 아프게 한다. 심지어는 재미 삼아 초등학생을 살해한 후에도, 가해자인 청소년들이 죄책감이나 잘못은커녕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서로 입을 맞추어 형량을 줄이는 작업을 했다는데 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단테의 신곡에는 폭력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자들은 지옥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지 않는다. 지옥의 가장 끔찍한 밑바닥은 마음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위해 남아 있다. 단테의 생각에는 마음의 범죄가 육체적 폭력보다도 훨씬 더 나쁜 범죄였다. 단테는 인간의 성격을 이해했다. 이러한 두 가지 죄악은 인간 존재의 두 가지 원초적 기능에서 비롯된다. 힘은 권력이요 권세요 육체성이며, 마음의 범죄는 교활함, 퇴폐성 정신성에서 온다.
찡그린 가면은 비극을 상징하는 힘의 연극, 웃는 얼굴은 희극을 상징하는 마음의 연극이라 위에서 언급했다. 요즘 미디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거의 폭력성이라 볼 수 있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좀비를 죽이는 게임부터 시작해서 영화는 또 어떤가. 죽이는 장면이나 파괴 장면이 없으면 흥행이 불가능하다는 괴담까지 떠돌 정도이다. 이미 관객들조차도 그런 ‘포르자’와 ‘포르다’에 푹 빠져서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작품을 만들고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죽이고 파괴하는 일은 쉬운데 희극은 어렵다’고 한다.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장면을 쓰고 만들기가 그리 쉽지 않다. 가장 웃기는 대사도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으면 우습지 않다. 적재적소가 절실하기도 하다. 그래서 희극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관객의 마음에 호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극은 무정부 상태를 그린다. 희극은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취해서 그 위에다 새로운 것을 첨가한다. 이중 의미 기법의 핵심은 관객이 이미 농담을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예의나 배려 따위는 개나 주는 세상에서, 홀로 아름답게 또 다른 세상을 꾸려 나가야 하는 게 숙제라면 과연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불행히도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른다. 누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 가르쳐 줄 수가 없다. 가르쳐 줘도 의심이 많다. 스스로, 정신적으로 강인해져야 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특히.
연극은 희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지적장치들을 발휘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서글픔, 기쁨, 우려 등의 복잡함 감정들을 이해한다. 해서 세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할 수 있도록 내면과 외면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다루고자 노력할 것이다.
강해연 / 이유 프로덕션 & 이유 극단(EU Production & EU Theatre) 연출 감독으로 그동안 ‘3S’, ‘아줌마 시대’, ‘구운몽’ 등의 연극과 ‘리허설 10 분 전’, ‘추억을 찍다’ 등의 뮤지컬, ‘Sydney Korean Festival’, ‘K-Pop Love Concert’ 외 다수의 공연을 기획,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