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하는 사람이 인생에 끼치는 영향 2
난 한 번도 인생에 대해 그런 식으로, 그게 마치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넣을 수 있는 박스에, 그것도 모조리 다 넣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연극이야? 나야? 선택해.”
“그게 무슨 질문이야? 그걸 어떻게 선택해. 둘 다 내 인생인데.”
“아니지. A냐 B냐 중 하나 선택하라고. 나야, 연극이야?”
“차라리 개가 되라고 해. 선택은 못 해. 절대로!”
그렇게 그녀는 나를 떠났다. 나는 전 여친과의 단란했던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둘 다 개를 키우는 게 희망이었다. 같이 살 집을 구한 뒤, 같이 살 커다란 하얀색의 개를 구하는 거다.
나는 개와 뛰고 공 던지기를 하고, 전 여친은 개와 잔디밭을 뒹구는 모습은 상상으로도 유쾌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나를 맞기 위해, 커다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전 여친과 개의 모습은, 그림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내 인생은 그게 그렇게 그런 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헤어졌던 내 전 여친이 드디어 카페로 들어 왔는데, 그런데 그녀 옆에는 우리가 늘 꿈꿔왔던 하얀색의 큰 개가 버젓이 서 있다. 두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로.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저 여자애, 괜찮은 개를 데리고 있네.”
“개가 저렇게 멋있을 줄이야.”
옆에 있는 사람, 뒤에 있는 사람,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전 여친의 개를 보고 있다.
내 전 여친인 그녀가 내 앞에 앉는다. 큰 개도 옆에 앉히면서(이번에 두 다리만), 물을 마시게 한다. 그리고는,
“너하고 헤어지고 내가 젤 가지고 싶었던 거야. 엄마하고 아빠가 무척 반대하셨지만 그래도 샀어. 네가 연극을 선택한 이유처럼 말야. 이제야 알겠어. 네가 왜 연극을 선택했는지. 나는 이 놈 없이는 못살아.”
그녀는 개를 사랑하는 여자였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늘 대화가 ‘개’였다는 것을 헤어지고 한참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는다. 내가 늘 ‘연극’을 얘기했듯이 그녀는 늘 ‘개’였던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다시 불금이 찾아왔다. 연극 연습을 처절하게 열심히 했다. 캐릭터인 ‘사기남’이 마치 나를 위해 탄생된 것처럼, 내가 캐릭터인지 캐릭터가 나인지도 모를 만큼, 몰입되었다. 연극 연습이 끝난 후,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연습장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식당이 최고다. 분식점같이 떡볶이, 오뎅, 꼬치, 강정 등을 판다.
“무엇이든 끝이 있어. 그게 인생의 법칙이지. 전 여친이 너 대신 개를 선택한 건 참 멍청하군. 하지만 그건 네가 무슨 짓을 했기 때문이 아냐. 대부분의 여자들은 멋있는 남자들을 알아보지 못하지. 겉만 보고 속은 보지 않아.”
꼬치를 먹으면서 동료 배우가 한마디 한다. 차라리 말하지 말고 떡볶이나 맛있게 먹지, 너덜너덜한 속을 다시 파헤치는 것 같다. 개와 비교를 당하다니. 나랑 헤어진 전 여친의 그 놈인 ‘개’와 동급 취급이라니. 이런 개 같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삶을 가진다는 건 이렇게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한 가지를 박스에 넣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매일매일 그곳에서 사는 것.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연극을 하면서,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멋지게 연기할 것이다. 나는 이 생각을 믿을 것이다. 그럼 나는 행복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전 여친이 연극 <구운몽 2>를 보러오는 꿈을 꾼다. 하얀색의 털을 날리는 개와 함께… 극장에서 받아줄런지 그걸 걱정하면서 말이다. 가능할까?
강해연 / 이유 프로덕션 & 이유 극단(EU Production & EU Theatre) 연출 감독으로 그동안 ‘3S’, ‘아줌마 시대’, ‘구운몽’ 등의 연극과 ‘리허설 10 분 전’, ‘추억을 찍다’ 등의 뮤지컬, ‘Sydney Korean Festival’, ‘K-Pop Love Concert’ 외 다수의 공연을 기획,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