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먹은 ‘말’
바야흐로 말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천지사방으로 흩날리는 시대를 맞이했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가 일상의 소통을 대부분 잠식했다. 온라인망을 따라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의 말이다. ‘발 없는 말 천리 간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수십만리를 단번에 날아 타인의 마음에 닿는다.
인터넷 세상에 말의 홍수가 난지 오래지만 어찌된 탓인지 사람간의 소통은 난해해지기만 한다. 간헐적인 불통이 아니라 ‘조국 사태’ 류의 문제에서는 진영이 나뉜 채 극한 대립과 충돌로 일관한다. 진영에 따라 정반대 ‘프레임’을 통해 모든 정보를 분석, 수정, 평가하기 때문에 공감대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다른 관점은 물론 이를 강화하기 위해 사실관계조차 첨삭과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소통이 많아질수록 불통과 갈등이 심화되는 역설적인 현실이다. 그 강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세상만사를 양극단으로 다르게 보는 신앙의 차원을 방불케 한다.
지난 5월 ‘국민의 힘’ 대표 경선에서 이준석 돌풍이 거세게 불 때 더불어민주당의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언급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젊은 세대의 정치적 부상을 거부하는 ‘꼰대’라는 것이다. 정 전 총리가 보수정당의 장유유서 문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라고 해명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금세 다른 주제로 옮겨지기 때문에 자칫 한번 각인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상승세를 보이는 국민의 힘의 홍준표 대선후보도 ‘돼지 발정제’라는 단어가 수시로 바쁜 그의 발목을 잡는다. 수 십 년 전 대학친구들이 여성에게 돼지 발정제 사용을 모의했다는 내용을 자서전에 넣었다가 지난 대선에 이어 지금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아무리 밝혀도 이를 거론하는 화자는 ‘홍준표=돼지 발정제’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1위 여권 후보인 이재명 지사도 ‘대장동 의혹’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5천억대 이익을 환수한 성공적인 공영개발’이냐 ‘소액을 투자한 민간업자가 천문학적 이익을 취한 대형 개발 의혹’이냐를 두고 두 관점이 격돌하고 있다. 신속한 수사를 통해 실체적인 진실을 규명하기보다는 이것이 여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상당 기간 별다른 결론 없이 치열한 말들의 전쟁만 지루하게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
야당 대선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고발사주’ 의혹에 휩싸여 있다. 작성자, 전달자, 수령자, 2차 전달자, 실제 고발주체, 신고자 등 일련의 관련자들이 있어도 진실 규명은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다.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말로 밝힐 수록 혼란만 가중됐다. 검찰과 공수처가 수사를 벌이지만 과연 진상이 드러날 것인가는 회의적이다. 혼선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말의 향연만 펼쳐질까 우려스럽다.
인터넷 세상을 떠돌고 있는 말들은 이미 그 객관적인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렸다.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돌진하는 화자의 의지가 말을 타락시켰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을 정도로 권위 있는 ‘말씀’은 사라졌다. 그저 이리저리 마음대로 쓰다가 효용이 다하면 시궁창에 던져도 전혀 아깝지 않을 비루먹은 ‘말’이 향방없이 떠돌아다닐 뿐이다.